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
시월은 마음이 가장 예민해지는 달이다. 모든 이별은 이 계절을 지나가고, 모든 그리움은 이 달에 다시 살아난다. 공기는 얇고, 바람은 부드럽다. 햇살은 낮게 깔려 길 위의 그림자들을 길게 늘인다. 세상은 여름의 열기를 조금씩 잊고, 나무들은 잎의 빛깔을 서서히 접는다. 한 장면이 끝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사이, 시월이 있다.
누구에게나 시월은 다르게 온다. 누군가는 사랑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마음을 묶는다. 누군가는 새로 시작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마침표를 찍는다. 나는 늘 그 중간쯤에 서 있다. 떠나보내야 할 것과 붙잡아야 할 것이 교차하는 자리. 그곳에서 바람을 맞으며 계절의 얼굴을 바라본다.
올해의 시월은 유난히 조용하다. 사람들의 걸음도 느리고, 말소리도 낮다. 길모퉁이에서 붉게 타오르는 단풍잎이 유일하게 세상의 열을 대신하는 듯하다. 나는 그 불빛 같은 색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사랑도, 계절도 결국은 이렇게 타올라야 끝난다고. 아름다움의 정점은 늘 사라지기 직전에 있다.
낙엽이 바람에 쓸려 흩어진다. 그것이 마치 오래된 편지들이 공중에서 흩어지는 듯하다. 그 속에는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이 실려 있는 듯했고, 나는 그 말들을 하나씩 줍듯 바라보았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아직 지워지지 않은 이름들이 떠오르고, 잊었다 믿었던 얼굴이 스친다. 시월의 바람은 그런 기억을 가볍게 흔들어 깨운다.
햇살은 따뜻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는다. 낮의 빛은 부드럽다가도 해가 기울면 금세 쓸쓸해진다. 창가를 스치는 빛은 더 이상 여름의 열기를 품지 않는다. 대신 그 안에는 어딘가 그리움에 젖은 온도가 있다. 뜨거움이 식은 자리에는 의외로 따뜻함이 남는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뜨거운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서야 비로소 깊이가 자란다.
시월은 이별을 품은 달이다. 떠나보내는 법을 배우고, 남겨진 것들과 화해하는 시간. 바람이 스칠 때마다 마음속의 오래된 문장들이 흔들린다. "괜찮아, 이제는 보내도 돼." 그렇게 계절은 우리를 조금씩 놓아주는지도 모른다.
나는 올해도 같은 길을 걷는다. 집 앞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며칠 뒤면 그 아래가 금빛으로 덮일 것이다. 바람이 불면 잎들이 일제히 날린다. 그 장면은 늘 같다. 그러나 그날의 공기, 내 마음의 온도는 매번 다르다. 해마다 같은 계절을 살지만, 같은 사람으로는 살지 못한다.
시월의 하늘은 높고 구름은 가볍다. 햇살은 짧은 각도로 비스듬히 떨어져 모든 사물을 감싼다. 그 아래에서 사람들의 걸음은 느려지고, 표정은 부드러워진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빛 속에서 누군가는 커피잔을 감싸 쥐고 생각에 잠긴다. 그들의 마음속에도 어쩌면 작지만 오래된 상처 하나쯤 있을 것이다. 시월은 그런 상처를 조용히 어루만지는 달이다.
밤이 되면 공기가 한층 투명해진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냉기에 어깨를 움츠리지만, 이상하게 그 서늘함이 싫지 않다. 여름의 열기가 사라졌다는 안도감, 그리고 겨울을 기다리는 준비의 냉기. 시월의 밤공기는 두 계절을 잇는 다리 같다. 서늘하지만 다정하고, 외롭지만 따뜻하다.
나는 이 달이 좋다. 모든 것이 조금씩 변하고,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잎이 떨어져도 나무는 남고, 해가 져도 다음 날의 빛은 다시 온다. 인생도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사랑이 끝나도 마음은 남고, 그리움이 사라져도 흔적은 남는다. 시월은 그 흔적을 받아들이는 달이다.
때로는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아프기도 하다. 누군가의 웃음, 손끝의 온기, 함께 걷던 길 위의 그림자.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것들이지만, 시월의 바람은 그 기억들을 다정하게 감싼다. 마치 “괜찮아, 그것도 너의 일부야”라고 속삭이듯. 그래서 나는 이 달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이상하게 평온하다.
하루가 저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을 올려다본다. 노을은 붉게 번지고, 그 위로 새들이 천천히 날아간다. 그들의 날갯짓은 고요하다. 어쩌면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계절의 끝에서 다시 돌아올 봄을. 그래서일까, 시월의 하늘은 슬프지 않다. 오히려 담담하다.
시월은 멈춤의 달이기도 하다. 더 이상 앞서 가지 않아도 되는 시간, 잠시 쉬어가도 괜찮은 계절. 빠르게 흘러가던 마음이 잠시 숨을 고르는 달. 나무도, 바람도, 사람도 그저 ‘있음’으로 충분한 달. 그래서 시월은 다정하다. 조용한 위로의 형태로 세상을 감싸 안는다.
하지만 고요함 속에도 떨림은 있다. 시월의 하늘 아래서는 아무리 단단한 사람도 잠시 흔들린다. 지나간 시간과 마주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잘 살아왔을까?” 그 질문은 누구에게나 남겨진 계절의 과제처럼 따라온다. 그러나 답을 찾지 않아도 괜찮다. 살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바람이 불어 낙엽이 흩어진다. 그 소리가 마음속에서 잔잔한 울림을 만든다. 인생도 그렇게 흩어지고, 모이고, 다시 흩어진다. 완벽한 모양은 없지만, 흩어진 자리마다 다른 빛이 생긴다. 시월은 그 빛을 바라보는 달이다.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생각한다. 모든 계절에는 각자의 온도가 있다면, 시월의 온도는 마음과 가장 닮았다. 따뜻하지만 금세 식고, 서늘하지만 오래 남는다. 그 온도 덕분에 사람은 살아가고, 기억은 부드럽게 남는다.
밤이 깊어가면, 세상은 더욱 조용해진다. 시월의 공기는 잔잔한 숨결처럼 느껴지고, 달빛은 방 안을 옅게 적신다. 나는 창문을 닫으며 생각한다. 모든 건 언젠가 지나가지만, 그 지나감 속에 남는 온기가 있다. 그것이 우리를 견디게 한다.
시월이 끝나면 또 다른 계절이 온다. 그러나 이 달이 남긴 온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낙엽이 다 져도, 공기 속에는 여전히 그 빛의 잔향이 떠돈다. 그래서 나는 이 달을 떠나보내면서도 늘 다시 만날 걸 안다. 시월은 떠나지만, 그 온도는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온도로 또 한 해를 견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