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으나 오지 않은 사람
첫눈이 내리던 날, 나는 약속을 믿었다.
하늘은 잿빛 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었고, 세상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유리창 너머로 흰 입자들이 조심스레 흩날릴 때, 나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메신저 창엔 ‘오늘 진짜 첫눈이에요’라는 내 마지막 문장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읽었지만 답장은 없었다.
그와 나는 데이팅앱에서 처음 만났다.
낯선 이름, 그러나 금세 익숙해진 호흡.
그는 말수가 적었고, 나는 불필요한 말을 싫어했다.
그는 이모티콘 대신 문장 부호를 자주 썼다.
句점 하나에도 생각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말했다.
“첫눈 오는 날, 볼까요?”
그 말이 농담인지 약속인지 분간되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았다.
기상청 예보를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했고,
코트를 꺼내며 괜히 미리 거울 앞에 서보기도 했다.
첫눈이 내리는 날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는 건,
그 자체로 이미 한 편의 영화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눈은 예보보다 일찍 내렸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진짜 오는구나.’
그 말이 가슴 깊은 곳에서 조용히 울렸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은 버스정류장 앞의 카페,
이름은 ‘윈터 블루’였다.
작은 창가엔 겨울 장식이 걸려 있었고,
커피잔의 김이 창문을 희미하게 흐리게 만들었다.
나는 약속 시각보다 스무 분 일찍 도착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기다리며 눈이 내리는 것을 보는 일,
그건 어쩐지 소설 속 장면 같았다.
세 시, 세 시 십오 분, 세 시 반.
휴대폰 화면은 고요했다.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커피는 식어갔다.
창밖의 눈발만 점점 더 촘촘해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기다림’이 이렇게 무겁다는 걸 알았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변명이 맴돌았다.
길이 막혀서 늦는 걸까, 아니면 카페를 찾지 못한 걸까.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 한구석이 서서히 식어갔다.
나는 코트를 여미고 밖으로 나왔다.
버스정류장에는 사람 몇 명이 서 있었다.
눈이 어깨에 내려앉자, 그 흰 점들이 금세 녹아내렸다.
버스가 도착했다.
나는 망설임 끝에 올라탔다.
차창 옆자리에 앉아, 눈으로 덮인 거리를 바라봤다.
세상은 희미한 흰빛으로 잠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난 직접 봤다. 차창 밖 너머로 걸어가는 그 녀석을.
검은 코트를 입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였다.
천천히, 그러나 망설임 없이 걸었다.
그가 향하는 길의 끝에 ‘윈터 블루’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왔었다.
그러나, 나에게 오지 않았다.
그는 왔으나 오지 않았다.
버스는 천천히 출발했다.
눈발이 유리창을 스쳤고, 그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졌다.
나는 창문에 손을 대보았다.
유리창 너머의 차가움이 손끝을 타고 심장까지 스며들었다.
그를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얼어붙었다.
그날의 눈은 그와 나 사이의 거리를 더 넓혔다.
버스 안은 따뜻했다.
히터 바람이 흐르고, 사람들은 조용히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나는 창밖에서 멀어지는 거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는 분명 이곳에 왔다.
하지만 나에게 오지 않았다.
그건 거절이 아니라, 어떤 방식의 작별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첫눈을 믿지 않게 되었다.
첫눈은 약속의 상징이 아니라, 부재의 예고장이었다.
눈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언제나 이별과 닮아 있다.
내리는 순간엔 반짝이지만, 닿는 순간엔 녹는다.
그리고 사라진다.
그날 이후로 버스를 탈 때마다 창밖을 본다.
사람들이 걷는 뒷모습, 불 꺼진 가게의 간판,
그리고 눈발 사이로 흔들리는 불빛.
어쩌면 또다시 그를 보게 될까,
그 생각만으로도 잠시 멈춰 선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나를 기다리게 되었다.
누군가의 발걸음을 기다리던 자리는 이제 내 마음의 자리가 되었다.
기다림의 끝에는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서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 또 다른 겨울이 왔다.
거리엔 캐럴이 울리고, 트리 위엔 금빛 전구가 반짝였다.
나는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눈이 내렸다.
하얀 조각들이 공중에서 부서지며 조용히 쌓였다.
버스 한 대가 천천히 정류장을 지나갔다.
그 안에, 예전의 내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차창에 비친 얼굴은 조금 더 차분했고,
그때의 설렘 대신, 이해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은 만나야 하고, 어떤 사람은 스쳐야 한다는 것을.
모든 기다림이 결실로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그날의 눈은 나를 상처 입히지 않았다.
다만, 나를 깨닫게 했다.
그는 왔으나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오지 못했으나, 그날 비로소 나에게 도착했다.
그 한 문장이 내 겨울의 요약이었다.
이제 눈이 내리면, 나는 멈춰 선다.
가로등 아래 쌓이는 흰 조각들을 바라보며,
잠시 그날의 버스 창을 떠올린다.
세상은 변했지만, 눈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내린다.
사람은 떠나지만, 기억은 그렇게 남는다.
눈은 내리고, 모든 것을 덮는다.
말하지 못한 마음도, 전하지 못한 인사도.
하지만 완전히 지우진 않는다.
희미하게 남겨, 언젠가 다시 꺼내보게 만든다.
그날의 눈은 사람을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를 마주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눈을 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주 조용히 그를 건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