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았지만, 잊지 못했다
눈이 내리는 날, 나는 늘 거짓말을 떠올린다.
세상이 하얗게 덮일수록, 사람의 마음엔 숨기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진다.
하늘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 속에는 울음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눈물이 식어 내려오는 듯했다.
눈이 한 스푼 떠먹은 눈물이라면,
그건 우리가 흘리지 못한 감정의 잔여물일 것이다.
말하지 못한 진심, 삼켜버린 고백,
닿지 못한 손끝의 체온들이 하늘로 떠올라
하얗게 식은 채 우리 위로 내리는 것.
나는 그를 오랫동안 사랑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내 하루의 절반을 채웠다.
그와 나 사이엔 언제나 적당한 온도가 있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기.
그 애매한 온도는 오히려 안심을 주었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눈처럼 투명해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금세 녹아버린다.
그날, 첫눈이 내리던 오후였다.
거리는 조용했고, 불빛은 흐릿했다.
그는 내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오래 침묵하다가 말했다.
“이제 그만하자.”
그 한마디가 내 안에서 천천히 부서졌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사랑했던 건 그가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나 자신이었다는 걸.
그래서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단 한 순간도 사랑한 적 없다.”
그 문장은 잔혹했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진실이었다.
그를 향한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공허였다.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었던 결핍,
누군가의 시선 속에 존재하고 싶었던 허기.
그를 통해 나 자신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다만, 외로움을 닮은 연민이었다.
그건 미움도 아니었다.
다만, 그리움의 잔향이었다.
눈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내 마음은 서서히 녹고 있었다.
그를 잃은 슬픔보다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지난날들이 더 아팠다.
이별 이후, 나는 오랫동안 눈을 미워했다.
눈은 모든 걸 덮으면서도 아무것도 지워주지 않았다.
그의 발자국이 사라진 자리에 눈이 쌓였지만,
그 흔적의 모양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사람은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잊지 않기로 선택하는 존재라는 걸.
나는 그를 잊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그 기억이 나를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던 그날의 차가움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 차가움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그건 이별의 냉기가 아니라,
내가 다시 나로 돌아가는 체온이었다.
눈은 자꾸 나를 멈춰 세웠다.
걸음을 늦추고, 생각을 들추고,
결국 나 자신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가장 외로울 때,
눈은 마치 위로처럼 내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품어준다.
나는 그를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눈이 내릴 때마다 문득 그를 떠올렸다.
그건 그를 그리워해서가 아니라,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의 나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 무지를 사랑이라 불렀다.
이제는 안다.
사랑은 ‘함께 있음’이 아니라,
‘떠나보낼 수 있음’으로 완성된다는 걸.
서로를 붙잡지 못할 때,
비로소 사랑은 자기 자신을 품게 된다.
눈이 한 스푼 떠먹은 눈물이라면,
그건 우리가 흘리지 못한 말일 것이다.
그날 하지 못했던 “괜찮아”와 “미안해” 같은 말들.
눈은 그 문장들을 대신 내려준다.
세상은 그 흰 빛 아래서 잠시 숨을 고르고,
사람들은 각자의 겨울을 견딘다.
나는 그를 단 한 순간도 사랑한 적 없다고 말했지만,
그를 통해 사랑을 배웠다.
사랑이란 용기라는 것을.
다시 다가가고, 또 멀어질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용기의 끝에서
스스로를 용서할 줄 아는 사람으로 남는 것.
눈은 녹는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녹은 눈은 물이 되고,
그 물은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사람의 감정도 그렇다.
사랑과 미움, 후회와 용서가
언제나 순환하며 우리를 자라게 한다.
이제는 눈이 내리면
나는 그저 멈춰 선다.
손바닥 위의 하얀 조각 하나를 올려두고,
그 안의 온도를 느낀다.
그 온도엔 사랑도, 미움도, 용서도 다 들어 있다.
그 모든 감정이 내 안을 돌고 돌아
결국 하나의 문장이 된다.
“괜찮아. 이제 울어도 돼.”
눈은 오늘도 내린다.
세상의 모든 눈물과 이야기들을 품은 채,
하얗게, 천천히, 아주 다정하게.
그 흰 조각들이 세상의 상처 위에 쌓이고,
그 위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다시 살아간다.
그게 눈이 하는 일이다.
울음 대신, 내려와서 덮어주는 일.
그리고 나는 그 하얀 세상 속에서,
잠시 눈을 감는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아직도 그날의 눈송이가 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