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는 밤, 달빛이 술잔을 기울인다

인사동 찻집에서 끝난 사랑

by Helia

인사동 골목 안, 겨울 찻집의 창문 너머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숨결이 유리창을 흐릿하게 만들고, 차향은 느리게 퍼졌다.
그는 따뜻한 잎차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차는 아직 뜨거웠고, 말은 차가웠다.
나는 그가 미리 준비한 듯한 이별의 문장을 듣는 동안
잔 속의 찻잎이 천천히 가라앉는 걸 바라봤다.
그건 마치 오래된 마음이 식어가는 속도와 같았다.

찻집 안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창밖으론 눈이 더 굵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던 거리도 이내 고요해졌다.
그 고요가 어쩐지 잔인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헤어지는 지금,
세상은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이상할 만큼 선명하다.
나는 울지 않았다.
눈이 대신 울어주고 있었으니까.
하얀 눈발이 유리창을 스칠 때마다
내 마음의 가장자리도 천천히 부서졌다.

그와 나는 오랫동안 사랑했다고 믿었다.
서로를 향한 말보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믿음보다 빠르게 식는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날 그가 떠난 뒤,
나는 남겨진 찻잔을 한참 바라보다가
차가 식어버린 잔을 비웠다.
그 맛은 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맑았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이별의 맛은 슬픔보다 담담함에 가깝다는 것을.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이 계속 내렸다.
달빛은 희미했고, 거리는 고요했다.
나는 무심코 술집으로 들어갔다.
혼자 마시는 술은 이상하게도 차향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한 잔이 비워질 때마다
그의 얼굴이 점점 희미해졌다.
달빛은 내 잔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눈은 세상을 덮고,
달빛은 마음을 비추고,
술은 그 마음을 녹였다.

그건 슬픔도 위로도 아닌,
단지 ‘끝’이라는 단어의 모양이었다.
나는 그 모양을 천천히 음미했다.
끝에는 언제나 시작이 숨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날만큼은 그 사실조차 믿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봄이 왔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흩어질 즈음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눈이 내리던 어느 밤,
나는 우연히 인사동을 다시 지나쳤다.

그 찻집은 그대로였다.
간판의 글씨는 조금 바랬지만,
문을 열자 그때와 같은 향이 났다.
나는 같은 자리에 앉아 차를 주문했다.
달라진 건,
그가 없는 것뿐이었다.

그날의 나는 여전히 내 안에 있었다.
다만, 그때의 사랑이 이제는 나를 흔들지 않을 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가장 깊은 사랑을 잃고 나서야
진짜 자기 자신과 마주한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나는 잔을 들어 올리고, 달빛을 바라보았다.
그 빛은 술잔 속에서 은색으로 번졌다.
달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내게 말했다.
“이젠 괜찮지?”

나는 대답 대신 잔을 비웠다.
입안에 퍼진 온기는 차가움과 따뜻함의 경계였다.
사랑의 온도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너무 뜨거우면 타버리고,
너무 차가우면 얼어버리는.

그때 비로소 알았다.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던 ‘나’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사랑은 결국,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라는 걸.

눈은 세상을 덮고,
달빛은 마음을 비추고,
술은 그 마음을 녹였다.

나는 술잔을 돌리며
그날의 눈송이를 떠올렸다.
하얀 조각들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 때마다
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기억의 모양은 둥글고,
그 둥근 끝에는 언제나 부드러운 체념이 남는다.

사람은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
다시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존재다.
그를 잊은 게 아니라,
이제는 그리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뿐이다.

창밖으로 고요한 밤이 흘렀다.
달빛이 유리창을 타고 내 술잔 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 빛을 바라보다,
살짝 잔을 기울였다.

그때 달빛이 술과 함께 흔들렸다.
나는 그 흔들림이 내 마음인지,
세상의 빛인지 알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순간만큼은 눈도, 달도, 나도 모두 고요했다는 것.

눈은 세상을 덮고,
달빛은 마음을 비추고,
술은 그 마음을 녹였다.
그리고 남은 건 오직,
조용히 자신에게 건네는 한 잔의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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