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위로
비가 내릴 때마다, 누군가의 이름이 젖는다. 그 이름은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 마르지 않았다.
네 눈물을 누가 닦아주나. 말간 얼굴이 스쳤다가 이내 고요해졌다. 나는 그럼 내 눈물을 누가 토닥여주나. 그 질문은 매번 빗속에서 다시 되살아난다.
처음엔 그저 하늘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건 하늘의 울음이 아니라 내 마음의 울음이었다. 유리창을 타고 내리는 빗줄기마다 내가 참아낸 날들이 묻어 나왔다. 젖은 세상 속에서 나는 늘 같은 물음에 갇혔다. 누가 내 슬픔을 닦아줄까, 아니 그전에 누가 내 마음을 알아줄까.
비는 기억을 데려온다.
그날도 비가 내렸지. 우산을 함께 썼던 좁은 거리, 서로의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간격 속에서 우리는 한참을 서 있었다. 말 대신 빗소리만 두 사람 사이를 흘렀다. 네가 먼저 고개를 들었고, 나는 네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이미 끝을 예감하던 순간이었다.
“그만 울어. 다 괜찮을 거야.”
그 말 한마디가 유난히 차갑게 박혔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나조차 내 마음을 닦을 용기가 없었으니까.
그날 이후로, 나는 비를 피했다.
비 내리는 날이면 괜히 몸이 무거워지고 마음이 바닥을 쳤다. 우산을 챙기지 않고 뛰어가던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했다. 저 사람들은 아마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 수 있겠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게 부러웠다.
시간이 지나도 이상하게 비의 냄새는 변하지 않았다. 젖은 흙냄새, 오래된 기억의 향. 그 냄새가 코끝을 스칠 때마다 마음속 무언가가 흔들렸다. 사람은 잊는 법을 배우지만, 향으로 남은 기억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네가 떠나던 그날의 공기까지도,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있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진다고.
하지만 나는 안다. 괜찮아진다는 건 상처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흉터 위에 새로운 하루가 쌓여가는 것뿐이라는 걸.
비가 내릴 때마다 그 흉터는 다시 젖는다.
그리고 나는 그 위를 천천히 어루만진다.
어느 날 문득, 비를 피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우산을 접고 걸었다. 처음엔 차가운 빗방울이 어깨를 때렸지만, 금세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알았다. 비는 괴로움이 아니라 위로였다는 걸.
하늘이 내 대신 울어주는 동안, 나는 조용히 내 마음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빗속에 서는 법을 배웠다.
누구의 손길도 없이, 내 눈물을 스스로 닦는 연습.
처음엔 어색했다. 하지만 곧 익숙해졌다.
어느새 나는 울음 대신 한숨을, 한숨 대신 미소를 배웠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가끔은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
“왜 그렇게 비 오는 날을 좋아해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웃는다.
그건 슬픔의 날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빗속에서 나는 내 마음을 다시 확인한다.
다시 사랑할 수 있고, 다시 울 수 있고, 다시 걸을 수 있다는 걸.
어느 여름날, 장대비 속에서 우연히 한 아이를 봤다.
낡은 우산을 들고,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서 있는 모습.
그 아이의 눈동자 속에 예전의 내가 있었다.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 내 우산을 내밀었다.
아이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 나는 울컥했다.
비가 내리면, 누군가의 어깨에 작은 온기를 얹을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날 이후, 나는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대단한 말이나 거창한 위로가 아니라, 그저 옆에 서주는 사람.
빗속에서 혼자 울지 않도록 함께 젖어주는 사람.
그게 진짜 위로라는 걸, 오랜 시간에 걸쳐 배웠다.
비는 여전히 내린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비는 슬픔을 씻어내는 동시에, 마음의 먼지를 닦아준다.
언젠가 흙탕물이었던 내 마음이 조금씩 맑아졌다.
비가 다 그치고 나면 언제나 하늘이 열리듯,
나의 하루에도 그런 틈이 생긴다.
빛이 스며들 틈.
나는 가끔 상상한다.
비가 내리는 어느 오후,
어딘가에서 너도 나처럼 창가에 기대앉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커피잔을 들고, 흐릿한 유리창 너머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아주 잠깐 내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고.
그 생각만으로도 조금은 따뜻해진다.
이젠 미련이 아니라, 고마움으로 남은 이름이니까.
비가 내리면 나는 잠시 멈춘다.
서두르지 않는다.
비가 그칠 때까지 그저 듣는다.
빗소리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괜찮아. 너는 잘 견뎠어.”
그 말이 들리는 듯하면, 나는 눈을 감는다.
누군가의 손길이 아닌, 내 마음이 나를 토닥이는 소리였다.
이제 나는 안다.
세상엔 각자의 비가 있다.
누군가는 이별의 비를, 누군가는 후회의 비를, 또 누군가는 미처 흘리지 못한 눈물을 대신 내리는 비를 품고 산다.
그래서 비가 내릴 때마다 나는 묵묵히 마음속으로 우산을 펼친다.
그 우산은 나를 위해서이기도, 어쩌면 그대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눈물이 이 빗속에서 조금이라도 씻겨 내려가길 바라면서.
밤이 깊어가면 빗소리는 잦아든다.
불빛에 반사된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흐른다.
그 속에 내 얼굴이 비친다.
한때 울음으로 가득했던 얼굴이 이제는 잔잔하다.
눈물 대신 미소가 남았다.
그건 내가 견뎌낸 시간의 무늬이자, 스스로를 닦아낸 사람의 표정이다.
비가 멎고 나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맑게 씻겨나간 구름 사이로 푸른 틈이 보인다.
그 틈 속에서 나는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주 조용히 중얼거린다.
“네 눈물은 내가 닦아줄게.
내 눈물은 내가 닦을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세상은 젖어간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젖는다는 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걸.
비가 내릴 때마다 네 이름이 젖고, 내 마음이 젖지만,
그 젖음 속에서 나는 다시 피어난다.
슬픔은 마침표가 아니라, 또 다른 쉼표일 뿐이니까.
비가 내리면 —
나는 오늘도 천천히 걸어간다.
우산을 들지 않고, 젖은 어깨를 그대로 내맡긴 채.
그건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조용한 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