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장|공책의 한 페이지 속 기억

종이 위에 멈춘 시간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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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책을 넘기다 보면, 어느 한 페이지가 갑자기 나를 붙잡는 순간이 있다. 수백 장 중 겨우 한 페이지에 불과한데도, 그 종이 위의 글자와 낙서, 자국과 번짐이 마치 작은 시간의 섬처럼 떠 있다. 다른 페이지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그 페이지만은 이상하게 손끝이 멈춘다. 오래전에 적어둔 문장 하나, 마음이 빠르게 뛰던 순간에 휘갈겨 쓴 글씨, 혹은 지우고 다시 쓰느라 두꺼워진 종이 결. 공책 속 한 페이지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당시의 나를 세밀하게 담아낸 작은 세계였다.

나는 오래전부터 공책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다른 물건은 냉정하게 정리하면서도, 공책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손이 가지 않았다. 겉표지의 구겨짐, 모서리의 닳아버린 흔적, 풀리지 않는 스프링 사이의 먼지조차도 어떤 기억을 끌어당기는 것 같아서였다. 특히 중간에 몇 장 찢긴 공책이라도, 그 빈자리마저 기억의 모양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공책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서 단절되지 않은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그 페이지들은 변하지 않고, 나만 변해 있을 뿐이니까.

가끔은 공책의 한 페이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특정한 감정이 되살아난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장면이 활자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고, 지나간 계절의 냄새가 다시 코끝에 감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적어두었던 문장. “조금 더 천천히 가도 괜찮다.” 그 문장이 적혀 있던 페이지는 이상하게 글씨가 크고 서툴렀다. 마치 울음을 참으며 적은 것처럼 글자 사이가 흔들려 있었다. 그 문장을 다시 보는 순간, 그날의 나를 다시 보게 된다. 너무 지쳐서 책상 앞에 고개를 묻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던 기억, 뭔가를 견디고 있었던 심장의 무게가 조용히 떠올랐다.

또 어떤 페이지는 페이지를 채우지도 못한 짧은 문장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내일은 괜찮아질까?” 그 짧은 문장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에 나는 어디까지 힘들었을까. 왜 그 질문만 적고 펜을 내려놓았을까. 그 페이지는 마치 여백이 더 많은 페이지였는데, 그 여백이 오히려 당시의 나를 더 깊게 증명했다. 무언가를 말할 힘도 없어서 문장 하나만 남긴 채 덮어버린 듯한 마음. 공책의 한 페이지는 그렇게 문장보다 큰 기억을 품고 있다.

하지만 기억이 전부 무겁고 슬픈 것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웃음이 나는 페이지도 있다. 친구와 장난치며 그렸던 낙서, 무의미해 보이는 그림 조각, 마음에 드는 노래 구절, 그날의 하늘이 예뻤다며 적어둔 세 줄 메모. 그런 페이지는 다정한 증거였다. 내가 잘 웃고, 잘 좋아하고, 잘 사랑하던 사람이었다는 흔적. 시간이 지나도 그런 페이지는 빛이 바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따뜻해진다. 그때의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았고, 세상을 향해 작게나마 기대고 있었다는 사실이 공책 속 글씨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기억이란 참 이상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한 페이지에 가득 적은 감정들이 모두 의미 있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기억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공책 속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흐려지지 않는다. 손끝으로 다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종이 위의 잉크는 날아가도, 글씨의 습관과 필압, 선의 방향, 글자 크기만으로도 그 순간의 내가 살아난다. 마치 페이지 너머에서 옛날의 내가 조용히 말을 거는 것처럼. “그날의 너는 이랬어.” “그날의 너는 울었고, 웃었고, 기다렸어.” 그런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가끔은 공책 속 페이지가 현재의 나를 지켜본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어떤 페이지는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과 너무 닮아서 놀랄 때가 있다. 마치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럴 때는 너무 불안해하지 마”라며 건네는 조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공책 속 페이지는 단순히 과거의 나를 담은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에게 계속 말을 걸어오는 기록이었다. 어쩌면 기억이라는 건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준비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공책의 한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그때의 나를 바라본다. 페이지 위에는 글씨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글씨를 적던 순간의 공기, 배경 소음, 조용히 흔들리던 마음, 불안과 희망이 동시에 있었던 그 묘한 떨림까지도 함께 붙어 있다. 그래서 페이지 하나가 작은 타임캡슐이 된다. 그 안에는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한 감정들이 통째로 보존되어 있다. 말이 되지 않는 문장마저도 그때 내 마음이 다급했다는 증거였고, 삐뚤어진 글씨도 노력하고 있었던 나를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이제는 안다. 공책의 한 페이지 속 기억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걸어온 길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을 마주하기도 하고, 어떤 페이지에서는 더 머물러도 좋았을 시간을 보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페이지는 다시 나아갈 힘이 되어준다. ‘이때도 견뎠는데 지금도 견딜 수 있겠지.’ ‘그때도 웃었으니 지금도 웃을 수 있겠지.’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를 붙잡아주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

그래서 나는 쉽게 공책을 버리지 못한다. 공책 속 페이지들은 나에게 필요한 순간에만 모습을 보이는 비밀 통로처럼 느껴진다. 한 장의 페이지를 여는 순간, 나는 그때의 나와 마주하고,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다시 천천히 이어갈 방향을 찾는다. 기억 속 페이지는 과거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종이는 낡아가지만 그 안의 기억은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기억은 종이에 남아 있는 잉크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는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공책 속 한 페이지는 그저 종이가 아니다. 그건 내가 살아냈던 시간의 가장 솔직한 조각이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내 마음 깊은 곳을 정확하게 기록한 흔적이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페이지들은 변하지 않는다. 그 페이지가 변하지 않는 덕분에, 나는 다시 내가 누구였는지를 잊지 않을 수 있다.

공책 속 한 페이지가 오늘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그 페이지가 시간이 아니라 ‘나’를 기록해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새로운 페이지를 계속 채워갈 것이다. 누군가가 기억을 사진으로 남긴다면, 나는 공책으로 남긴다. 문장 하나, 단어 한 줄, 짧은 낙서 하나라도, 언젠가 다시 펼쳤을 때 오늘의 내가 ‘그때의 나’를 꺼내볼 수 있도록.

그렇게 공책의 한 페이지 속 기억은 내 안에서 조용히 숨 쉬며 남아, 언젠가 필요한 순간 나를 붙잡아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