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장|자리

떠난 자리의 온기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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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누군가 비켜준 자리에 앉아왔다. 남들이 먼저 고르고 남긴 한 칸, 그저 빈 의자였을 뿐인데도 나는 묘하게 안정을 느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간에서 나는 번번이 망설였고, 한 발 늦게 움직였고, 결국 누가 떠난 자리의 온기가 완전히 식기도 전에 그 위에 몸을 얹곤 했다. 누군가는 성격 탓이라 말하겠지만, 사실은 내가 내 자리를 확신하지 못해서였다. 앉을자리가 없진 않았지만 ‘여기가 정말 내 자리인가?’라는 의문이 늘 따라다녔다. 그래서 자리 앞에 서 있으면 이상하게 숨이 막혔고, 앉고 나서도 한참 몸이 굳어 있는 때가 있었다.

사람은 자리가 바뀌면 마음도 흔들린다. 학교 다닐 때, 자리 바꾸기 공지가 나오는 순간부터 마음이 어수선했다. 나는 창문에서 세 번째 줄, 오후 햇빛이 살짝 스치는 그 자리를 누구보다 좋아했다. 바람이 들면 종이가 간질이듯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고, 햇빛이 교과서 위에서 부서지는 장면이 늘 좋았다.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세상이 조용히 정렬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 달에 한 번씩 선생님이 자리 배치를 갈아엎었다. 친구들은 수다 떨며 좋아했지만 나는 마음 한쪽이 찢겨나가는 것처럼 아쉬웠다. 그곳은 단순히 책상 하나가 아니었다. 내 마음이 놓여 있던 작은 세계였다.

그 자리를 떠나 다른 책상에 앉게 되면 공간은 똑같이 네모난 교실인데도 감정의 구조는 완전히 달라졌다. 창문이 주던 안도감은 사라지고, 칠판 글씨가 낯설게 보이고, 누군가의 연필 긁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익숙했던 자리에서 옮겨진다는 건, 마음의 무게중심이 한순간에 뒤틀리는 경험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사람은 공간에 앉는 게 아니라, 마음을 놓을 곳을 찾는 것이라고.

어른이 된 지금, 자리는 물리적인 ‘앉는 자리’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의미를 띠게 되었다. 사람과의 거리, 관계의 온기, 나를 둘러싼 감정의 흐름.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누군가의 곁에 앉으면 마음이 고요해지는가 하면, 어떤 곁은 설명할 수 없이 불편했다. 오래 머문 자리라고 다 내 자리는 아니었고, 잠시 스쳐간 자리가 오래 남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의 곁이라는 자리는 의자보다 훨씬 예민하고 훨씬 다정하며, 동시에 훨씬 잔혹했다.

떠난 자리에는 체온이 남는다. 나는 그 체온 앞에서 종종 오래 멈춰 서 있었다. ‘이 온기는 언제까지 남아 있을까?’ ‘이제는 정말 떠나도 괜찮을까?’ 미련처럼 남아있는 온기를 붙들며, 이미 떠난 사람의 그림자를 더듬었다. 때로는 차가운 현실보다 그 자리의 잔향이 더 사람을 아프게 한다. 머문 시간이 아니라 남겨진 온기가 사람을 흔드는 법이다.

관계도 그랬다. 처음 누군가 내 옆에 앉아 마음을 들이밀 때, 나는 그 순간이 너무 낯설었다. 내 자리에 누군가 앉는다는 건, 그만큼 마음의 일부를 내어주는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문을 열어 ‘여기 괜찮으니 와서 앉아도 된다’고 속삭이는 행위. 그리고 그 사람이 정말로 앉는 순간, 나는 그 자리만의 세계를 새로 꾸미기 시작했다. 말 한마디, 웃음 한 번, 사소한 장면 하나까지도 자리를 데우는 열이 되었다. 그런데 떠날 때는 너무나 허무했다. 방금까지 다정했던 손이 밀어낸 자리는 순식간에 텅 비었고, 나는 빈 의자 앞에서 어른스러운 척 웃다가 돌아서서 울었다.

어쩌면 나는 자리를 통해 사람을 배운 셈이다. 어디에 앉느냐보다, 누구와 앉느냐보다, ‘누가 떠났을 때 무엇이 남는가’를 더 똑똑히 기억했다. 떠난 사람들의 자리에는 미세한 체온과 말의 부스러기, 눈물 흔적, 웃음의 잔향이 남았다. 그 모든 것을 치우고 새롭게 앉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결국 깨달았다. 자리는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라고. 떠난 자리도 흘러가고, 남은 사람도 흘러가고, 그 안에서 나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모양을 바꾼다.

그러다 문득, 자리를 잃은 시간이 내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알았다. 의자 없이 서 있는 순간들. 어디에도 몸을 두지 못해 어색하게 서 있던 날들. 그때 나는 가장 멀리 보았다. 내가 어떤 자리를 원하고, 어떤 자리만은 피해야 하는지, 어떤 자리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잃어버린 자리 덕분에 알게 된 나의 모습들. 자리에서 밀려난 순간이 오히려 나를 중심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사람의 곁도 그렇다. 누군가의 옆에서 웃던 내가 어느 날 홀로 걷게 되었을 때, 외로움보다 선명해지는 감정들이 있다. 그 사람과 있던 자리가 정말 나에게 좋은 곳이었는지, 아니면 겨우 견디던 자리였는지 깨닫게 된다. 오래 앉아 있었던 기억이 따뜻함을 보장해주지 않았고, 짧게 지나간 인연이 깊은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어떤 자리는 돌아보면 안 되고, 어떤 자리는 돌아보아야 의미가 있으며, 어떤 자리는 영영 그리워해야 했다. 사람의 곁이라는 자리는 그만큼 생생하고 변화무쌍했다.

이제는 조금씩 이해한다. 자리는 내가 쥐고 흔드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아지는 것이라는 걸. 억지로 오래 앉아 있다고 해서 내 자리가 되지 않았고, 너무 빨리 떠났다고 해서 그 자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삶은 여러 자리 사이에서 천천히 배열되는 나만의 자리 배치표였다. 누군가는 일찍 앉고, 누군가는 천천히 앉고, 어떤 자리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내 것이 되었다. 그리고 어떤 자리는 영영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것도 괜찮았다. 모든 자리가 나를 품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확실한 진실은 이거였다. 자리가 나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앉는 순간 그곳이 나의 자리가 된다는 것. 내가 내린 선택이 공간을 바꾸고, 관계를 바꾸고, 삶의 온도를 바꾼다. 그래서 나는 이제 서둘러 자리를 잡지 않는다. 빈자리가 두렵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빈자리는 상실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자리보다, 비어 있지만 나를 기다리는 자리가 더 따뜻했다.

언젠가 또 다른 자리가 나에게 조용히 문을 열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바람을 맞을 것이고, 다시 웃을 것이고, 다시 기대어 앉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날에는 그 자리에서 떠나는 나를 보며 조용히 손 흔들어줄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인생은 자리들을 지나며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긴 여정이고, 나는 그 여정 속에서 내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어떤 자리든, 결국 그 위에 앉는 순간부터 그것은 나의 세계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 위에서 오늘도 조용히 숨을 고르며 다음 자리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