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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생활 끝

얻은 것은 무엇인가?

by Helix

한국으로 들어온 지 3개월이 지나고 4개월에 가까워지고 있다. 논문이 열등한 성적으로 무사히 통과되면서, 두 번째 석사와 관련된 모든 것을 머리에서 잊고 한국에서의 생활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 영국에 있는 동안 영국생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때마다 몇 안 되는 영국의 지인들은 '그래도 돌아가면 여기를 그리워할 거야.'라던가, '영국의 좋은 점이 생각나면서 그리움이 순식간에 밀려들어올 거야.' 같은 충고를 했다. 하지만, 나의 배우자가 아직 영국에 있어 그의 옆자리만이 그리울 뿐 딱히 영국이 그리워진 적은 없다. 딱 하나 한국의 서점에 왔을 때 그 빈한한 서가를 보고, '내 조국의 사람들이 이렇게 얄팍하다니!' 하며 통탄한 적은 있다. 나는 비록 천박하고, 얄팍한 사람이지만 나의 동포들만이라도 그렇지 않았으는 소망이다. 이렇듯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국 서점을 빼고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영국이 그립지 다. 그저 단돈 5천 원에 김밥같이 괜찮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을 때는 우리의 식문화와 물가에 감사한 생각이 든다. 이런 이야기를 미국에서 십수 년을 살고 있는 친구에게 하니, "그래도 3년은 살았어야 미운 정도 드는 거야."라는 타박을 들었다.

Gower Street의 Waterstones. 영국 서점의 품격을 알 수 있는 곳이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나를 아는, 내가 아는 사람들과 부대끼고, 내가 속한 사회에 다시 소득세를 내며 기여하면서 역시 내가 있을 곳은 이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국에 가기 전에는 나같이 이상한 사람도 어울릴만한 다른 곳도 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했지만 현실은 결국 한국이 가장 나에게 적합한 나라였다. 우리나라의 미래가 극히 어둡지만 어차피 자식새끼도 없는데 현재만 살면서 '조국'에 세금을 내며 '애국'하며 살련다. 유발 하라리의 신작이 나오기 전 그의 인터뷰에서 하라리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 사회에서의 애국심은 자기가 납부한 세금이 다른 사회 구성원에게 이전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유튜브로 그 인터뷰를 듣다가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낸 세금은 내가 지금의 삶을 누리게 해 준 탑골공원의 노인들을 위해 쓰여야 하지, Northbrook Street에 있는 Costa의 야외 테이블에서 개나 쓰다듬으며 라테를 마시는 영국 노인네들을 위해서 쓰이면 안 된다.


나의 글을 보면 영국에서의 내 삶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괴로운 시간이 나를 조금 철들게 해 준 것이 사실이다. 영국에 가기 전의 나는 내가 가진 혜택들을 전부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표출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을 쌌던 것이다. 나의 오만 방자함에 경종을 울린 것은 영국의 현자들이 아닌, 나와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또 다른 외지인들이었다. 모든 역사적인 사건과 시대의 분수령이 된 사건들은 늘 흔적을 남긴다. 2008년의 금융위기와 유로위기도 영국사회에 돌이키기 어려운 큰 흔적을 남겼는데, 바로 이민자들이다. 영국의 이민자라고 하면, 중동이나, 인도의 이민자들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물론 영국 신생아중 이름이 모하메드인 아기가 가장 많은 것과, 엄청난 수의 IT 인력을 인도에서 수입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의외로 영국의 이민자의 상당수가 브렉시트 전 EU국가들에서 건너왔다.


나의 운전 연수 선생이었던 R도 그런 사람이었다. 도저히 좌측통행과 roundabout에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나는 운전연수를 받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사람이 R이었는데, 그 역시 우측통행을 했던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운전을 해서 잔뜩 긴장한 나를 달래기 위해 R은 자신의 인생 썰을 풀기도 했다. R의 고향은 상남자 어부의 도시-R의 표현에 따르면, 포르토다. 그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는데, 고작 R이 17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충격을 심하게 받았던 R의 어머니는 가계를 제대로 꾸려갈 수가 없어서 장남인 R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R은 전 유럽을 돌며 컨테이너 트럭을 운전하는 옆집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돈을 벌기도 했다. 유로 위기로 포르투갈 경제가 박살이 나자 영어를 한마디 못했던 R은 하는 수 없이 영국으로 건너왔다. 식당의 접시닦이, 트럭 운전, 레스토랑 셰프, 운전연수 강사, 운전연수 업체의 오너가 영국에서의 R의 족적이다. 지금 그는 세 아이와 두 마리의 레트리버를 기르며, 아내의 옥스퍼드 학비를 내주고 밤에는 파트타임으로 DJ를 하기도 한다.


운전을 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R은 어린 나이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한 명의 당당한 사업체의 오너로 거듭났는데, 나는 고작 외국에서의 삶이 마음에 안 든다고 징징거리기나 했으니 말이다. 한국에서의 내 괜찮았던 삶이 그저 운이 좋아, 부모를 잘 만나고, 별 걱정 없이 고등교육을 마쳐서 가능했다는 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나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운명을 흔드는 크고 작은 사건이 발생할 수 있고, 평온한 삶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내 삶은 혜택 받은 삶이었지만, 나는 거기에 감사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가지고 살지 않았던 것이었다. '감사'라는 단어에 도사리고 있는 종교적 뉘앙스 탓에 내가 어디에 뭘 감사하고 살아야 하는데?라는 시건방진 생각을 했었는데, R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정말 구제불능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많은 지인들과 만나며, 영국에서 결국 얻은 것은 나의 오만함에 대한 깨달음이었다고 전했다. 다수의 사람들은 '네가 도를 닦고 왔구나.' 하며 나름의 축하를 해줬지만, 남들과 다른 시각을 가진 일부는 그들의 개성이 잔뜩 담긴 논평을 해줬다. 모든 상황을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헤쳐나가는 M은 '너도 걔 상황이었으면, 똑같이 해낼 수 있었을 걸?'이라며, 스스로를 낮춰보지 말라며 용기를 북돋아 줬다. 꽉 찬 육각형의 부산 출신 상남자 K는 '왜 여자가 그런 상황을 상정하는 거지? 그런 고민은 남자들이 하는 거고, 남자가 자신의 여성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라고 해서 '역시 너는 가부장'이라며 나의 빈축을 샀다. 엄청 유능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독특한 사람인 친구 A는 이렇게 평했다. '내 핵부자 친구가 나를 보며 자신은 잘못 살고 있었다고 반성하던데, 꼭 사람들은 자기보다 힘든 사람을 봐야 간접경험으로 철이 드는구먼.' 뭐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역시 항변할 수가 없었다.


결국 돌아서 다시 여의도다. 한국을 떠날 때 내 기대와 달리, 영국에서의 경험이 내 커리어의 전환을 가져오진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내 능력껏 열심히 해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세상을 바꾸고, 엄청난 것을 성취하는 것은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 역할로 돌리고 원을 보낸다. 나는 내 삶에 감사하면 그것으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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