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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ix Apr 17. 2022

형태가 있어도 없어도 소멸하기 마련이다. 미술관도.

리움미술관 관람기

 형태가 있는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형태가 없는 것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


어제 리움 미술관에 다녀온 나의 소회이기도 하다. 리움 미술관에 처음 가본 것은 대학을 졸업하기 전이다. 지인과 서울의 전시관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당시 대학생의 끼니 2회분 정도인 1만 원을 내고 들어가서 삼성그룹과 그 컬렉션이 주는 아우라에  압도당한 기억이 난다. 이후, 삼성의 모 계열사에 입사하게 되어 사원증만 내면 공짜로 리움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리움에서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간혹 반차를 내고 혼자 와서 미술관에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나와 같이 식견이 부족하여 작가들의 철학적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미술관을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작품과 그 작품들이 전시된 공간이 주는 아우라를 즐기기 위한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페기 구겐하임이 잭슨 폴록의 그림을 사모은 것이 단순히 그와 놀아나서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널찍한 집의 광활한 벽을 장식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크고 새하얀 - 어떤 색이든 - 공간에 거대한 작품이 걸려있으면 일반적인 경우 사람들은 압도되기 마련이다. 미술품, 특히 현대 미술품은 회화의 경우도 조형적인 특징이 있어 공간을 지배한다. 개인적으로 이우환은 작품이 공간을 지배하는 것을 잘 활용하는 작가라고 생각하며, 부산시립미술관의 이우환 스페이스는 그의 작품과 잘 어우러지는 곳 중 하나다. 현대미술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고미술 역시, 미술관이라는 적막한 공간에서 미술품 자체에 집중하게 만들면서, 순간적으로 관람객을 작품이 만들어진 순간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이우환 스페이스에서 바라본 창밖 풍경



공간은 기억이기도 하다. 특정한 작품이 특정한 전시관에 있다는 것이 각인되면, 작품이 생각날 때는 작품을 봤던 그 시간과 분위기가 기억나고, 전시관을 지나칠 때는 좋아하는 작품이 생각난다. 이건희 회장이 작고하고 삼성가가 이건희 컬렉션을 기증하면서, 리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작품과 공간에 대한 연결고리가 사라졌다. 아직도 리움이 설레는 공간이기는 하지만, 고미술 컬렉션 중 좋아하는 작품들이 빠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홍도의 군선도는 살아남았지만, 그의 맹호도와 소림명월도, 그리고 장승업의 작품들 다수를 찾아볼 수 없었다. 현대미술 섹션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권진규 작가의 '지원의 얼굴'도 자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건희의 사망 전의 리움이 이병철 - 이건희 - 홍라희 컬렉션이었다면, 지금은 홍라희만 남은 듯하다.


리움에 있던 작품들 중 인상적인 부분들


 각자 좋아하는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 그림을 보고 순간적으로 그 작품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들 때 그림을 좋아하게 된다. 직접 본 그림 중 맹호도-호랑이의 꼬리를 유심히 보다가 꼬리가 움직이는 느낌을 받고 움찔한 적이 있다-와 소림명월도-제목을 모르고 그림을 봤을 때 안개 낀 가운데 해가 뜨는 모습을 그린 줄 알고 감탄했다. 달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가 그러하다. 더 이상 리움에 가도 좋아했던 작품들이 그 자리에 있지 않는다는 것에서 상실감을 느꼈다. 이건희 컬렉션이 언제든지 개방되어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나마 스스로 위안 삼을 수 있는 것은 이건희 컬렉션의 예약에 성공했으며, 지금 서울 시립미술관에서는 권진규 특별전이 열린다는 것이다.


 어찌 됐든 리움 미술관에 가졌던 개인적인 감정과 기억은 이제 사라졌다. 공간은 그대로지만 목적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다른 추억과 기억을 남겨줄 것이다. 벽돌과 철근이 사라지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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