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 골프 연습장이 전부였던 그 곳
홍굴이 해물짬뽕 천안점이 생길 때, 그 주변에는 도로, 주유소 하나, 골프 연습장 하나가 전부인 말 그대로 황량한 국도였다. 실제로 이 자리에서 식당을 한다는 것을 보고 보는 사람들마다 미쳤다고 했고 가족들 또한 누구 하나 서대표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가 음식 맛에 대해서 스스로 “완뽕했다.”고 할 만큼 사랑하는 맛이었고 이거라면 될 꺼라는 자신이 있었다. 마케팅 또한 자신이 있었다. 그 직감과 자신감으로 무장해서 시작한 것이 홍굴이 짬뽕이었다.
결정적으로 남들이 미쳤냐며 손가락질 하던 이 자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황량한 국도였지만 사실 주변 공단 근로자들로 출 · 퇴근 시간에는 도로가 꽉 막힐 정도로 차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라는 것을 서용원 대표 본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장소에 대한 확신 또한 강하게 있었다.
보름 전부터 가게를 오픈한다는 홍보를 하고 오픈 3일 전에는 마지막 준비를 한다는 마음으로 무료 시식회 까지 열었다. 결과는 뜨거운 반응으로 돌아왔다. 준비된 재료가 모자를 정도로 고객이 방문을 했던 것이다.
그 모든 확신과 노력들이 모여 2008년 3월 홍굴이 해물짬뽕 천안점은 성공적인 첫 발걸음을 떼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서용원 대표 역시 하루아침에 이런 성공적인 가게를 만들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어릴 때부터 외식인의 길을 가고자 했던 사람 역시 아니었다. 전기 기술자를 진로로 삼아 전기 다루는 일을 했었던 그였다. 전기라는게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하지만 그만큼 위험성을 동반한다. 서용원 대표 역시 그런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결국 전기 사고로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기는 일이 생기게 되었고 생계를 위해서 다른 일을 찾다가 결정한 것이 외식업이었다.
근면 성실하고 능력 있던 덕에 특별히 어려운 것도 없었을 뿐더러 외식사업 팀장까지 파격 승진을 하면서 승승장구하며 회사 생활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 였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창업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어느 날 회사 돈 50억을 결제하면서 ‘나도 외식업으로 50억을 벌어야겠다!’고 결심이 서던 운명적인 날이었다.
그 날로 퇴직을 결심하고 사표를 제출하기 시작하기를 7회,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2005년 7월이 되어서야 겨우 호텔 출신의 인재를 자기 자리에 앉히고 회사를 그만 둘 수 있었다.
그렇게 잘 나가던 회사생활을 그만두고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처음 도전한 창업이 “고향솥단지”라는 삼겹살집이었다. 당시 회사원으로는 잘 나갔지만 집 까지 구입한 터라 융자 상환으로 부족한 창업 자금을 주변으로부터 융통해서 겨우 만든 식당이었다. 하지만 첫 창업에 대한 자신감을 꺾으려는 듯 소위 금겹살이라고 불리는 삼겹살 가격 파동이 일어났다. 서 대표 역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고난 역시 서대표의 의지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지난번의 문제점들을 고민하고 분석한 후 “삼겹살에 소주한잔”이라는 상호로 테이블 7개의 가게로 재기에 나섰다. 처음엔 이 가게 역시 매출이 거의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위치 또한 아파트로 가는 언덕 중턱에 있어 마냥 쉽게 접근한다고 하긴 어려운 자리였다.
그 때 서용원 대표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서 대표는 이벤트나 다른 무언가를 하기에 앞서서 아파트가 집인 입주민들이 집으로 가기 위해서 언덕을 올라오다가 자신의 가게 앞에서 한번쯤 쉬어가는 것을 보고는 가게에 제일 먼저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들이 중간에 힘드니까 가게 앞 의자에 앉아서 잠시 쉬었다 가시라는 작은 배려였다. 이런 사소한 배려 덕에 가게 앞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작은 사랑방이 되었고, 이로 인해 가게에 관심을 가지고 찾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엔 시도도 안했을 법한 비데를 과감히 설치하고 화장실 바닥에 조약돌도 깔면서 멋스러움을 추구하려고 하는 등 고객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진심을 고객들도 알아주었는지 점점 매출은 오르기 시작하더니 6개월 후에는 결국 일 매출 100만원을 돌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