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는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어도
어떤 이야기를 누구한테 말할지는 늘 마음에 정해져 있다. 그것은 금방 정해지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그 이야기를 가장 잘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도 곧 머릿속에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럼 바로 그 사람이다. 그를 만나 이야기를 시작하면 된다.
어쩌면 뻔한 일이다. 내 이야기를 말하고 싶다는 것은, 결국 이해받고 싶기 때문이어서, 그 이야기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능숙하게 찾아내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훨씬 더 많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끝내 말 못 하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끝없기도 하다.
전 남자 친구에게 회사 생활을 점점 말하지 않게 되었던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역력해서였다. 그렇게 상대가 정해놓은 범주 밖에 있어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받을 수 없는 말들은, 그에게 꺼내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것인가는 내가 정하는 것 같아도, 실은 상대가 정하는 것이었다.
토요일 저녁, 스무 살 때의 오랜 친구를 만났다. 저녁을 나누고, 그에 어울리는 술 한 잔도 더했다. 맥주를 다시 더했다. 한참 한강을 보며 앉아 있었고, 완연한 봄 밤이었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던 내 이야기를 했다. 분명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였으나, 그는 이상해하지도, 당황하지도, 비웃지도 않고, 단지 편하게 들어주었고 끝까지 답해주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그것이 어떤 이야기여도, 언제여도 그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낼 수 있는 친구였다. 여전히 그때와 같았다.
회사에서의 나는, 내 이야기를 누구한테 말해야 할지, 찾을 수 없다. 끝내, 여기서 나는 이해받을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서, 조금 나아진 마음만으로, 아주 괜찮은 척 속이며 지냈다. 그러나 분명히 내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쪽이 아무리 편해도, 나는 이해받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알았다.
이제는 정말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