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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블 Jun 28. 2021

외할머니와 닭

백숙



외할머니집은 경상북도 청송 시골 산골짜기다. 어릴 적 살던 인천에서는 산 넘고 물 건너가다 보면 10시간이 부족할 때도 많았다. 잘 닦인 도로 위를 내비게이션의 말대로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5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외할머니는 1남5녀를 두셨는데 설이나 추석을 맞아 외할머니네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면 금세 대가족이 됐다. 그때부터 아빠와 울산 이모부의 움직임이 바빠진다. 옛말에 장모님은 사위가 오면 씨암탉을 내준다고 하는데 연세가 많은 외할머니는 사위들이 알아서들 씨암탉을 잡아먹도록 했다.


할머니네집 뒷마당에서 나고 자란 방목형 닭들은 포동포동 살이 오를 대로 올랐다. 자식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함께 먹을 식사량은 닭 한두마리로는 텍도 없기 때문에 아빠는 닭을 몰고 이모부는 닭을 잡는 상황 한 시간은 족히 이어진다.


“이서방! 왜 못 잡아!” “아 형님, 그리로 모는데 우예 잡습니꺼.”


땀을 뻘뻘 흘리며 서너마리 잡고 나면 그때부턴 손질이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 후엔 곧바로 온가족이 약을 한알씩 먹어야 한다. 외할머니네 백숙은 옻닭이 특징인데 옻껍질을 벗겨 닭과 함께 끓이는 수증기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우리 엄마.


고생을 하는데도 굳이 옻닭을 먹는 이유는 다들 옻닭을 ‘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옻은 피를 맑게 하고 몸도 따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한 마리는 족히 먹은 것 같은데도 탈 한 번 안 난 거 보면 소화도 아주 잘된다.


대가족이 함께 모여 맛있게 먹기로 이만한 음식도 없다. 아빠와 이모부는 닭을 잡아 손질한 일을 영웅담처럼 쏟아내고 엄마와 이모들은 새끼 새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먹이를 주느라 바쁘다. 처음에는 약재 맛이 풀풀 나서 먹기 싫다고 입을 꾹 다물던 동생들도 10명 넘는 친척들이 야무지게 닭을 먹는 걸 보면 입맛이 당길 수밖에 없게 된다.


일찌감치 약을 먹고 음식을 만든 엄마는 그날 이부자리를 펼 때 즈음부터 온몸을 긁는다. 약을 먹어도 알레르기가 더 쎈 모양이다. 그래도 엄마 기분은 좋아보인다. 오랜만에 할머니와 이모들을 보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엄마와 천장을 보며 가만히 누워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든다.


할머니네는 닭과 관련된 추억이 또 있다. 할머니 집에 가면 겨우 하루 이틀 머물다 오는 경우가 대부분지만, 방학이나 뒤로 며칠 여유 있는 명절에는 주왕산에 들리곤 했다. 주왕산은 설악산이나 지리산만큼 유명한 산은 아니지만 가을 단풍이 아주 예쁜 국립공원이다. 얼마나 예쁜 등산코스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고, 나에게는 특식을 먹으러 가는 코스다.


주왕산 기슭에는 조금 특별한 약수터가 있다. 약수물이라고 하면 으레 맑고 시원한 물을 생각하겠지만, 김이 약간 빠진 듯탄산수다. 철 함유량이 많아 약간 비린 맛도 나는데 이때 옆에 놓인 엿과 함께 먹으면 간(!)이 딱 맞다. 주인 없는 엿통엔 셀프로 1000원씩 넣어놓으면 된다.


이모부와 함께 산에 오를 때면 10L짜리 물통 서너개를 함께 들고와서 지고 가곤했다. 말 그대로 약이어서 소화가 안 될 때 소화제로 쓸 수도 있고 빈혈이나 관절염이 있는 이들에게도 좋다고 한다.


산은 입구에 도착해 사진을 찍으면 우리끼리는 등반한 것으로 쳐준다. 마음속으로 등산을 열심히 했으니 이젠 주왕산 특식인 달기백숙을 먹으러 가야 한다. 아까 말한 탄산 약수물에 청송에서 나고 자란 닭을 한마리 푹 고우면 완성된다. 약수를 닭과 함께 끓이면 초록빛이 감도는 부들부들한 백숙이 완성된다.


요즘에는 달기백숙 외에도 닭 코스가 꽤 유행이라고 한다. 닭 한마리가 회부터 튀김, 강정, 반계탕, 죽까지 풀코스로 변신하는 게 특이하다.


매번 가야지, 가야지 생각은 하는데 좀처럼 마음 먹을 수 없는 거리라 매번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된다. 이 글을 쓴 핑계로 올 가을에는 주왕산에 가봐야겠다. 목적은 단연 먹방이다. 산행은 먹방을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노랗게, 붉게 물든 나무들 사이에서 달기백숙을 거나하게 먹고 나면 산을 오르기 전보다 2kg은 거뜬하게 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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