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여름이더라도 쏟아지는 비를 30분 정도 맞으면 참 춥다. 알고는 있었지만 경험하니 더 확실히 알겠다. 비만 오지게 맞고 결국 풋살 결승에서 뛰지 못했다. 덜덜 떨다가 급작스럽게 등장한 햇빛에 퀴퀴하게 마른 채로(동남아의 우기란 이런 식이다) 우승 기념사진을 찍었다. 트로피와 메달을 거머쥐었으나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나와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공을 찼다. 주에 다섯 번씩 풋살을 했는데도 여전히 실력은 형편없었다. 노력 이 자식, 이렇게나 사람을 배신해도 되는 건가. 한껏 우울해지다가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풋살 선수가 직업이었다면 속상함이 문제가 아니라 생계가 위험했을 것이다. 운동이 취미라서 얼마나 감사한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오늘은 진로를 결정하리라 선포했던 날이 있었다. 다음 주부터 대학 원서를 내야 했으므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다섯 시간이면 충분하고도 넘칠 줄 알았는데 웬걸, 치열한 고민에도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당연했다. 대학 학과 하나로 인생이 결정된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겁이 나서 무슨 선택이 가능했겠는가.
자존감이 높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나는 크게 못하는 것이 없는 학생이었다.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없었다. 좋아하는 일들은 많았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걸고서까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사학과에 가서 숨겨진 국사의 비밀을 파헤쳐도 재밌을 것 같았다. 경영학과를 나와 CEO가 되거나 세계 경제 정세에 뛰어드는 일도 의미가 있겠지. 심리학자가 되어 사람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일도 흥미로워 보였다...
사람은 좋아하면서도 잘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데 그게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당연했다. 18년을 교육 시스템이 원하는 대로 공부만 해왔으니 해본 게 있어야지. 일단 부딪혀서 여러 경험을 해야 나를 알아가는 법인데 대학에 떨어지면 인생이 망하는 줄 아는 고등학생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어쨌든 원서를 내야만 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흥미가 있지 싶은 과를 성적에 맞춰 넣어 교대에 갔다.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알고 보니 나는 사람과 소통하는 일을, 기왕이면 내가 말을 많이 하는 쪽을 선호했다. 스스로 기획과 창작을 해서 성과를 거둘 때 뿌듯함을 느꼈다. 교사는 딱 여기에 속했다. 운이 좋게도 첫 직장부터 적성에 맞는 곳을 찾았다.
내가 근무하는 국제학교에서는 초, 중, 고등학교가 함께 있다 보니 꿈을 두고 고민하는 청소년을 많이 접한다. 축구 선수가 꿈인데 솔직히 어렵겠죠, 제가 좋아하는 일이 뭔지 모르겠어요.... 전형적이지만 그렇기에 남 일 같지 않은 고민들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나라는 사람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에도 지금처럼 살아도 되나,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사나 고민 중일 것이다. 뻔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일단 뭐라도 하기. 경험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나를 알아가는 것임을 상기하기. 너는 직장이 있으니까 하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모범답안은 그렇다. 일단 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내가 말한 바는 완벽한 정답이 아니다. 그건 누구나 그렇다. 우리 모두 처음으로 살아보는 인생이므로. 무엇을 선택하든 적당한 후회와 아쉬움은 남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우선은 도전해 보시길. 해보고 아니면 다시 돌아오면 되지. 삶은 의외로 길고, 마음처럼 되면 오히려 수상한 게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