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현민 Mar 29. 2023

'다중 우주'가 존재한다면

그곳에서의 내 삶은 어떨까

배우 양자경(양쯔충, Michelle Yeoh)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로 제95회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여우조연상은 앞서 1958년 제30회 아카데미에서 일본 배우 미요시가 영화 '사요나라'로 처음으로 수상했고, 이후 2021년 제93회 아카데미에서 한국 배우 윤여정이 '미나리'로 수상한 바 있지만, 주연상의 경우는 남녀를 통틀어 아시아 배우로서 최초의 영예다. 이에 자연스럽게 양자경의 오스카 무대에서의 수상 소감을 비롯하여 영화 속에서 다뤄진 미국 이민자로서의 삶과 가족에 대한 의미 등이 거듭 회자되며 연신 화제가 됐다. 이민자 가정을 지키려는 '여성'이라는 공통분모로 인하여 '미나리'의 윤여정이 종종 함께 소환되기도 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스틸


물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진정한 강점은 장르와 형태가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는 데 존재한다. 극을 관통하는 것은 '멀티버스(Multiverse)'의 구조다. 흔히 '다중 우주(多重宇宙)'라고도 불리는 해당 이론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현재의 우주 외에도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우주의 내가 실재한다는 설정이 핵심이다.


영화 속 에블린(양자경)은 미국에 이민 와서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남편의 이혼 요구, 딸과의 심적 갈등, 노쇠한 아버지의 부양, 그리고 세무당국의 압박 조사까지 맞닥뜨리면서 괴로운 현실을 살아가던 중에 우연한 계기로 다중 우주의 세계를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다중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신들의 능력을 빌려와 세상과 가족을 구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다. 이 과정에서 주요하게 등장한 무술에 능숙한 유명 영화배우 에블린의 모습은 실제 양자경의 삶과도 겹쳐지면서 묘한 현실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양자경은 영화 '예스마담', '007 네버다이', '와호장룡' 등으로 국내에서도 액션 스타로서 큰 관심과 사랑을 받은 바 있다.


이와 같은 '다중 우주'라는 설정은 그다지 대중에게 생소하진 않다. 이미 앞서 선보인 작품들 중에 이러한 설정을 차용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마블의 경우 MU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4부터 6까지를 '멀티버스 사가'라고 공식적으로 지칭하고, 다중 우주 개념을 적극적으로 스토리 핵심 배경으로 활용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재작년 연말 개봉했던 영화 '스파이더맨 : 노웨이 홈'과 지난해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대표적인 예다. 글로벌 OTT(Over The Top)를 통해 공개된 '로키' 시즌1이나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 마니아'도 이들과 결을 같이 한다. 다중 우주라는 설정은 전작에서 죽었던 이를 다른 우주에서 자연스럽게 부활시키고, 기존에 펼쳐진 스토리를 별다른 설명 없이 180도 뒤집을 수 있는 핍진성을 부여할 수 있어서 작중 스토리를 더욱 확장하거나 변형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된다.


MCU 외에도 '멀티버스 판타지 로맨스'를 표방한 대만 인기 드라마 '상견니'가 최근 영화로 재탄생해 극장에서 상영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이견은 있지만 '다중 우주'와 '평행 우주'를 동일시하면, 기존에 타임 슬립을 소재로 한 국내의 여러 작품들도 여기에 포함하는 것이 가능해 절대적 수량은 훨씬 더 늘어날 수 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 스틸


다중 우주는 양자역학을 비롯한 여러 과학 이론에 겹겹이 보호받으며 일정 부분 현실성을 부여하는 듯하지만, 실상 현재로서는 국내에서 주목받고 있는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장르와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는 그저 허상에 불과한 영역이다. SF(Science Fiction)라는 명칭 그대로, 과학적 사실이나 이론을 바탕으로 창작된 허구에 속한다.


다중 우주는 어쩌면 과학의 영역이라기보다 인간 정서와 욕구에 더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내가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자책이나 후회, 그리고 기회비용으로 인해 발생하게 된 반대급부에 대한 지워지지 않은 열망 같은 것들이 혼재한다. 현실적으로는 닿을 수 없는,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을 것 같은 것에 대한 인간 본연의 궁금증과 열의로 가득 찬 영역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도 있다. '다중 우주'가 품고 있는 놀라움, 가능성 등이 현실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치유해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나쁘지 않지만 그것으로 인해 지금 당장 직면한 '현재의 우주'를 단순히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노릇이라는 사실이다. 그보다는 지금 당장의 상황과 삶을 현실적으로 바꿀 수 있는 진짜 노력을 쏟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다중 우주'는 분명 흥미롭다. 하지만 그 즐거움에 현재의 내 삶을 저당 잡혀서는 안 된다. 즐거움은 만끽하되, 현실에서는 이러한 콘텐츠 경험과 학습을 바탕으로 더 신중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해 스스로가 책임지는 삶에 에너지를 쏟을 시간이다.




2023년 3월 22일자 국방일보 21면에 게재된 [박현민의 연구소] 연재글입니다.

해당 칼럼의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20230322/1/ATCE_CTGR_0020020018/view.do



매거진의 이전글 김은숙이 집필하고 송혜교가 완성한 '더 글로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