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작의 재림’, 혹은 ‘시뮬라크르의 예언’

장 보드리야르로 읽는 K-콘텐츠의 시뮬라시옹

by 박현민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흔히 ‘희대의 망작’으로 불린다. 야심이 판단력을 앞질러버린 감독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제작비가 쥐어졌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한국 영화계의 교보재에 가까운 사례다. 개봉 당시 이 영화는 기술적 과욕과 난해한 서사, 통제되지 않는 상상력으로 꽤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다만 20여 년이 흐른 지금, 조롱 섞인 힐난을 걷어내고 이 작품을 다시 본다면 우리는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완전히 붕괴된 시대의 감각이다. 이 영화는 실패작이라기보다, 장 보드리야르가 예견한 ‘시뮬라시옹’의 세계를 가장 투박하고도 정직하게 증언하는 유물에 가깝다.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스틸

보드리야르는 현대를 이미지와 기호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현실을 대체해버린 시대로 진단했다. 그는 보르헤스의 우화를 빌려 설명한다. 어느 제국의 지도 제작자들이 너무 정밀한 지도를 그린 나머지, 지도가 영토 전체를 뒤덮어버렸다는 이야기다. 지도가 영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가 곧 영토가 되어버린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제는 지도가 영토보다 먼저 존재하고(Precession), 실제 영토의 파편들이 오히려 지도 위에서 썩어간다고 선언한다.


그는 이미지의 역사를 네 단계로 정리한다. 처음에 이미지는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고, 다음에는 현실을 비틀거나 감춘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현실이 사라진 빈자리를 이미지로 덮어버리며 부재를 은폐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이미지는 어떤 현실과도 무관한 순수 시뮬라크르가 된다. 이 네 번째 단계에서 이미지는 더 이상 현실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이라는 닻을 내리지 못한 채, 기호들이 기호들끼리만 서로를 참조하며 뱅글뱅글 도는 자기준거적 회로로 거듭난다.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단계에는 참과 거짓을 분리할 ‘최후의 심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호가 스스로 현실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실제와의 비교는 이미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주인공 ‘주’가 배달 가방을 내던지고 접속하는 게임 세계는 단순 도피처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보다 더 강력하게 실제를 규정하는 모델의 공간이다. 현실의 ‘주’는 무력한 배달 노동자다. 하지만 게임 모델 안에서 그는 명확한 퀘스트와 서사를 부여받은 영웅이 된다. 더 이상 실제가 스스로를 생산할 기회는 없다. 오직 모델화된 시뮬레이션만이 존재할 뿐이다.

영화 <매트릭스> 스틸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가상현실을 다룬 영화 <매트릭스>와 흥미로운 대비를 이룬다. <매트릭스>는 가짜 세계 뒤에 ‘진짜 현실’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며, 인물들은 그 원본을 되찾기 위해 투쟁한다. 이는 보드리야르의 이미지 2단계인 ‘현실을 은폐하는 이미지’의 세계관이다.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진단한 시뮬라시옹의 세계에는 더 이상 돌아갈 원본이 없다. 때문에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오히려 <매트릭스>보다 더 보드리야르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인물들은 원본을 회복하려 하지 않고, 현실보다 더 의미 있어 보이는 가상의 모델 속으로 기꺼이 들어간다. 동화라는 ‘원본’ 역시 사이버펑크적 액션으로 휘발되며, 이미지가 실제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 ‘순수 시뮬라크르’의 네 번째 단계에 진입한다.


재미있는 점은 20여 년 전 이 영화가 시도했던 ‘게임 세계로의 접속’이 이제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문법이 됐다는 사실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이나 <내 남편과 결혼해줘> 같은 ‘회귀물’은 인생 자체를 언제든 리셋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임의 로직으로 치환한다. 죽음과 부활이 서사의 충격이 아니라, 기본 전제가 되는 세계. 보드리야르식으로 표현하자면, 사건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결말이 설계되어 있는 시뮬레이션의 질서다. 시청자들은 리셋 이후의 세계를 ‘현실보다 더 공정한 현실’로 받아들이며, 오히려 되돌릴 수 없는 실제 삶을 결함 있는 버전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이미지의 3단계 ‘현실의 부재를 감추는 이미지’가 장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전지적 독자시점> 스틸

웹소설에서 영화로 재탄생한 <전지적 독자 시점>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 논리를 구현한다. 텍스트(지도)가 현실(영토)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시뮬라크르의 선행’이 시각적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소설의 설정이 현실이 되는 순간, 실제의 물리 법칙은 사라지고 시스템의 코드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보여준 증강현실(AR)에 의한 현실 잠식 역시 같은 맥락이다. 가상이 현실 위에 덧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가상이 현실의 문법 자체를 교체해버린다. 보드리야르가 경고한 ‘실제와 가상의 화학적 용해’가 바로 이 순간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월간남친> 스틸

과거에는 가상이 현실의 쉼표였다면, 이제는 가상이 현실보다 더 체계적인 정답으로 군림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월간남친>처럼 현실의 팍팍함을 벗어나 가상의 연애 모델에 침잠하는 행위를 두고, 우리는 흔히 ‘현실 도피’라는 말로 뭉뚱그린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눈으로 보면 이는 정확히 거꾸로 된 진단이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를 분석하며 이렇게 지적했다. 디즈니랜드가 상상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이유는, 나머지 미국 사회가 현실인 것처럼 믿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마찬가지로 <월간남친> 같은 가상 연애 콘텐츠가 ‘허구’의 영역에 격리될수록, 정작 실제 삶의 비루함은 더욱 자연스러운 ‘현실’로 수용된다. 가상 연애는 현실 연애의 대리물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 연애가 도달할 수 없는 기준점, 원본보다 더 원본다운 시뮬라크르가 된다.

결국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우리가 이미 시뮬라시옹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투박하게 증언하는 예언서에 가깝다.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이미지의 네 단계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이미 마지막 단계, 어떤 현실과도 무관한 순수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우리가 이 영화를 비웃으면서도 묘한 기시감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 역시 매일 아침 인터페이스를 통해 각자의 ‘이세계’에 접속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실제와 가상을 가려낼 최후의 심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상이 충분히 매혹적이라면, 그것이 곧 현실이 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현실보다 더 매혹적인 시뮬라크르를 뒤쫓는 ‘현대판 성냥팔이 소녀’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