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혐을 여혐이라 부르지 못하고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야 한다. 악령도, 범죄도.

by 징니

17일 새벽 1시, 강남 수노래방의 공용 화장실에서 23세의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이 '여성혐오'에 의한 살인으로 해석되며 피해자에 대한 추모 열기가 빠르게 확산됐다. 트위터 상에서는 '#강남살인남'이라는 해시태그가 퍼져나갔고, 강남역 10번 출구는 추모의 메시지가 담긴 포스트잇과 하얀 국화꽃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22일, 경찰은 강남역 살인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지방경찰청은 피의자의 심리면담 결과를 분석한 결과 "표면적인 동기가 없고,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직접적인 범죄 촉발요인이 없다"며 "조현병에 의한 '묻지마 범죄'에 해당한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증오범죄와 정신질환 범죄는 구분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나는 경찰의 발표를 이해할 수 없다. 아니,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1.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당선인은, 강남역 살인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의 페이스북에 "피의자의 정신질환 경력 등 '여성혐오 범죄'로 단정짓기 어려운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낯모르는, 관계없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계획적인 범행임은 분명하며 그 저변에는 일베와 소라넷 등으로 대변되는 비뚤어진 남성중심주의 하위문화가 존재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라고 썼다.

'낯모르는, 관계없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계획범죄를 저질렀지만 여성혐오 범죄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라는 말일까. 피의자가 직접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고, 범행 하루 전에 흉기를 준비했고, 1시간 30분가량 동안 남자 6명은 그냥 보내고 처음 들어온 여성을 살해했지만 여성혐오 범죄는 아니라고 한다. 여성혐오로 인정받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세상이다. 아니, 범인이 직접 여자라서 죽였다잖아요.


2.

정신질환 경력을 언급한 표 당선인처럼,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도 "조현병으로 4차례 입원한 피의자 전력을 보면 의사 결정 능력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며 "여성혐오 범죄라기보다는 그냥 묻지마 범죄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글쎄, 정신병력이 있다는 게 여혐을 여혐이 아니게 만드는 걸까?

정신병을 가진 사람이 모두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그게 모두 정신병 때문인 것은 아니다. 피의자는 분명하게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이것이 정신병으로 인한 망상이라고 해도, 그 망상에는 여성혐오적 맥락이 존재한다. 남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보다 여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이 남자에게 특별히 더 불쾌한 상황이 되는 사회적 배경이 그것이다. 우리 사회에 여성혐오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가 범죄의 이유로 '여성들의 무시'를 댈 수 있었을까.

한 가지 더. 피의자는 1시간 30분 동안 마주친 남자 6명은 그냥 보내고, 처음 들어온 여성을 살해했다. 남자는 살해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6번, 여자를 살해하겠다는 결정을 1번. 의사 결정 능력이 이렇게 뛰어날 수가 없다. 또한 그는 '여자인가?'라는 질문을 6번 되풀이하고, 아니라는 답을 내렸다. 이건 '묻지마 범죄'도 아니다.


3.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은 사건 이후 트위터에 "세월호 참사가 나고 수백번 외쳤고, 현수막에도 수천장 적혀져있던 우리의 다짐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 그런데 백주대낮에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상대가 여성이든, 아이이든, 장애인이든, 혹은 남성이든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야한다. 슬프다"라고 썼다.

선의가 바탕이 된 발언이지만, 동시에 많이 아쉬운 발언이기도 하다. 왜일까. 여기에는 미국의 'Black Lives Matter'(이하 BLM) 운동을 끌어와야 할 것 같다.

BLM은 지역 자경단원이 아무 죄 없는 흑인 청소년을 쏴 죽이고도 정당방위라며 기소되지 않은 사건을 계기로 시작됐다. 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 세 단어짜리 슬로건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반해 김광진 의원의 발언과 동일한 맥락의 슬로건이 등장했다. "All Lives Matter",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는 슬로건이었다. 이 슬로건에 힘을 실었던 마틴 오말리 주지사는 결국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했다.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는, 항상 옳을 수밖에 없는 문장이 문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All Lives Matter"라는 슬로건이 'All'을 내세움으로써 'Black'을 가리기 때문이다. BLM은 흑인들이 생명을 위협받을 만큼 심각한 차별을 겪고 있음을 알리고, 이를 직시하고 개선할 것을 요구하는 평등운동이었다. 여기에 'All'을 끌어오는 것은 'Black'이 처한 처지를 은폐하고, 변화의 여지를 차단하는 일이다.

오말리의 'All'과 같이, 김광진 의원은 '세월호, 아이, 장애인, 남성'을 언급했다. 물론 모든 개별 집단들은 중요하다. 그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면 해결해야 하는 것이 맞다.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런 사회는 특정 집단과 관련된 사건을 두고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아이, 장애인, 성소수자, 외국인 등 각각의 집단과 관련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사건들의 본질을 명확히 규정하고, 호명하고, 논의해야 한다. 이번 사건과 같이 여성혐오가 분명히 드러나는 상황에서 젠더 이슈를 떼어놓고 얘기하자고 하는 것은 BLM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다.


4.

위에서 언급한 표창원, 이수정, 김광진 세 명의 발언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번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든, 모두를 만족시키고 싶어서든, 어쨌든.

'정신병 환자에 의한 묻지마 살인'이 아닌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하고,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약자가 아닌 구체적인 약자를 지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름을 가져야 가시화될 수 있고, 가시화되어야 논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인 범죄자와 운이 나빴던 피해자로 프레임을 단순화시키면 편할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그런 프레임으로는 '모두가 안전한 사회'같은 하나마나한 소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사안을 단순화하는 프레임을 경계하고 부수적인 요소들을 모두 걷어낸 후, 남아있는 본질적인 요소에 초점을 맞출 때 비로소 무엇을 해야 할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제대로 호명해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언어는 중립적이지 않다. 모든 낱말은 뇌의 프레임 회로를 통해 정의된다. 이러한 회로는 도덕적 가치의 특성을 규정하고, 도덕적 가치의 측면에서만 유의미한 특정 쟁점의 본성을 정의한다. 더욱이 프레임 회로는 단순히 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감정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정치적 쟁점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 직감을 지배하고 쟁점(과 심지어는 사실)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약한다. 그리고 이 프레임 회로는 강력한 이미지를 동반한다. 이것이 바로 이성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조지 레이코프∙엘리자베스 웨흘링,『이기는 프레임』)

사람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 동시에 코끼리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린다(하필 코끼리..코끼리는 핑크...). 이처럼 언어는 생각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번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영화 <검은 사제들>의 구마 의식에서, 사제와 부제는 악령에게 '이름을 밝히라'고 계속해서 외친다. 그들은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이름을 알아야만 했다.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야 한다. 악령도, 범죄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