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것은 성당이나 와이너리가 아니야

처음 만난 유럽이 내게 보여준 것들

by 징니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것은 성당이나 와이너리가 아니야. 뒷모습들이야. 포르투에 머물 때 내가 여러 차례 그 앞을 지나갔던 바다를 향해 있던 야외 카페가 기억나. 모두들 휴대전화 따위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어. 아름다운 뒷모습들이었어. 그런 모습은 그 사람들을 보게 만들지 않아. 대신 그의 자리에 앉아서 그가 보는 것을 나도 보고 싶게 만들어. 잠시나마 ‘나’로부터 벗어난 모습들은 그토록 다정하더구나. (정혜윤, 《스페인 야간비행》)


여행의 시작은 참으로 즉흥적이었다. 작년 여름 대외활동에서 만난 친구가 있다. 이건 정말 인연 아닌가, 싶은 과정을 거쳐 만나게 된 친구였고, 우리는 이내 가까워졌다. 그런데 그 친구는 활동이 끝나고 2주 후면 교환학생을 위해 바르셀로나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만난 지가 한 달 됐는데 이제 일 년을 못 보네. 내가 바르셀로나 놀러 갈까?" (당연히 헛소리였다)

"응! 놀러와, 언니!" (얘도 그냥 한 소리였겠지)

"그래? 나 진짜 간다?"

하겠다고 말한 건 무조건 해야 하는 강박이 있는 나는, 정신 차려 보니 비행기표를 사고 있었다. 이왕 스페인까지 가는 거 이웃나라도 들르지 뭐, 하면서 포르투갈도 추가. 19박 20일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 나의 생애 첫 유럽 여행이자 해외여행이었다.


나는 인천공항에 들어설 때부터 다시 인천공항에 들어올 때까지 모든 게 신기했다. 첫 번째 도시였던 리스본.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저녁 여덟 시였다. 밖은 캄캄했고 비가 왔다. 공항버스를 타고 호스텔로 가는 내내 창 밖을 바라봤다. 사무실로 보이는 건물 안, 서너 명의 사람들이 책상에 둘러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가본 다른 나라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이랬다.

'우와, 토익 파트 1이다!'

그렇게 시작된 20일 동안의 여행. 벨렘 지구의 에그타르트도 먹었고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도 봤지만, 나에게 정말 새롭게 다가왔던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첫 여행이라서 할 수 있었을 생각들.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것


L1060935.jpg Seville, Spain

여행하면서 참 많이도 걸었다. 하루에 이만 보 이하로 걸은 날이 하루뿐이었을 만큼. 걷다 보면 자연히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건물들, 사람들, 비둘기... 하여튼, 여행 초반에는 그렇게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이 느낌은 뭘까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한 유형의 사람들을 계속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바로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걷거나 거리낌 없이 스킨십을 하는 중년과 노년 부부들.

결혼한 남자 연예인들이 TV에 나와서, 집에 가기 싫고 아내가 없는 날이 천국이라는 류의 말을 하는 게 일상인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자식 보고 산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 내가 어릴 때부터 이런 부부들의 모습을 일상적으로 보고 자랐다면, 결혼에 대한 나의 생각이 지금과는 달랐을까 싶었다. 꼭 부부가 아니더라도,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여기는 유럽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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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L1060911.jpg Seviile, Spain

위화감의 또 다른 이유는 '와,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일이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건 대뜸 반말하고 호통치는 1호선의 할아버지들, 줄을 설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어 보이는 할머니들,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고 지하철을 전세 낸 듯이 행동하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이었으니까.

그래서 트램에서 자리를 양보해주신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그야말로 문화충격이었다. 양보하라는 무언의 압박만 받아봤지, 내가 양보를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젊은이들 못지않은 패션감각도 신기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자신을 꾸미는 일에 소홀해질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면서 깨달았다. 그런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나라여서 일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부러운 건 부러운 거니까. 아,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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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생명을 가진 상점들
P20160126_000045510_E05FC10C-2716-4EC6-B318-C01D5D20BC10.JPG Porto, Portugal

나는 프랜차이즈를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오늘만 해도 GS25에서 물 한 병을 사고, 올리브영에서 립밤을 사고, 홈플러스에서 오렌지를 샀다. 지금 이 글도 스타벅스에 앉아서 쓰고 있다. 프랜차이즈에 분명 여러 장점이 있으니 이용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그것밖에 없어서'다. 새로운 곳에 가보고 싶어도 당장 주변에 있는 게 프랜차이즈뿐이니까. 연남동이나 익선동 같은 곳들이 요즘 뜨고 있는 것도 프랜차이즈 말고 뭔가 특색 있는 곳들에 대한 갈증 때문일 듯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들에는 유명한 성당보다 소소한 상점들이 더 많다. 자전거를 파는 곳이면 간판 위에 미니 자전거가 매달려 있고, 유제품을 파는 곳이면 문 앞에 젖소 조각이 세워져 있다.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쿵쾅거리는 음악을 틀지 않아도 그곳만의 특색으로 시선을 끄는 상점들이 눈 돌리는 곳마다 있었다. 건축가 유현준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걷고 싶은 거리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얼마나 많은 이벤트가 일어나는 거리인가, 어떠한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는 거리인가 등이라고 말한다. 내가 하루에 이만 보를 넘게 걸어도 지치지 않았던 이유는 가는 곳마다 걷고 싶은 거리였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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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처음 만난 유럽이 내게 보여준 것들은 결국 내가 이제껏 본 적 없던 모습들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보고, 듣고, 느끼고 나면 내 인생은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건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여행을 떠나기 이전의 나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좋은 일이다. 다시 유럽을 만나러 가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