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에서 만난 사람들
2016년 1월 19일부터 2월 6일까지, 다소 갑작스레 떠났던 포르투갈과 스페인 여행. 어느새 여행을 다녀온지 한 달 하고도 반이 지났다. 한국에 돌아가면 유럽이 너무 그리워지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할 만큼 나는 금세 한국 생활에 적응했고 여행의 기억들은 조금씩 흐려져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생생히 기억나는 곳이 있다. 포르투갈의 포르투. 그곳에서의 기억을 글로 적어보려 한다.
내가 가진 여행 습관들 중 하나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보통 여행의 시작이라 하면 가이드북, 인터넷 등을 총동원해 정보를 찾고 계획을 세우는 것일 텐데, 나는 일행이 있지 않은 이상 아무런 정보와 계획 없이 일단 떠나고 보는 편이다. 그런 일들을 워낙 귀찮아하는 성격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마주한 여행지가 주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준비랍시고 한 일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다녀온 지인들에게 어떤 도시가 갈 만하냐고 묻는 일뿐이었다. 이것저것 물어보며 '리스본 가면 꼭 에그타르트 먹어' 다음으로 많이 들은 이야기가 '포르투 진짜 좋아'였다. 나는 여행을 결정하기 전엔 들어본 적도 없는 도시였던 터라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대체 얼마나 좋길래?
리스본에서 버스를 타고 세 시간여를 달려 포르투에 도착하니 저녁 8시. 주변은 깜깜했고 비가 왔다. 호스텔을 전날 급하게 예약한 터라 가는 길도 제대로 알아놓지 못한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주변엔 와이파이를 쓸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호스텔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보게 된 포르투의 첫 모습은 어둠뿐이었다. 8시를 막 넘긴 이른 시간에도 불이 켜진 곳이 거의 없었다. 지친 몸과 캐리어를 끌고 도착한 호스텔은 리스본에서 묵었던 곳과 사뭇 달랐다. 시끌벅적하고 활기가 넘쳤던 리스본의 호스텔과 달리 정적이고 격식을 갖춰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샤워와 짐 정리까지 마치고 나니 밤 10시.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전날 밤에 호스텔에서 받은 포르투 지도 한 장만 들고 길을 나섰다. 잠들기 전에 다운받아 둔 구글 지도도 있었기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데 이게 웬걸, 걸을수록 사람 한 명 없는 음침한 골목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한국에서조차도 헤매기 일쑤인 길치에 방향치라는 걸 잊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맨 끝에 나타난 큰 도로와 강!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다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냥 걷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에 구글 지도를 들여다보니, 누가 방향치 아니랄까 봐 이번엔 방향을 잘못 잡았다. 강에 있는 다리가 유명하다길래 멀리 보이는 다리만 향해 걸었는데, 정반대 방향에 다리가 하나 더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뒤돌아 걸어온 만큼의 정확히 두 배를 더 걸어서 유명한 '동 루이스 1세 다리'에 도착했다. 두 시간을 쉼 없이 걷고 난 후였다. 지쳐있던 나는 일단 먹고 보자는 생각으로 식당에 들어갔다. 이때 갔던 식당이 아직도 기억난다. 메뉴판과 계산서 같은 사소한 것들까지 기분 좋아지는 디테일로 가득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직원이 정말 친절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으며 필요한 건 없는지, 음식은 맛있는지 묻곤 했다. 식당을 나서는 나에게 멋진 여행이 되길 바란다는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리 2층에 올라서서 도우루 강을 바라본 순간 고생스러웠던 두 시간을 모두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언제까지고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강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멋진 풍경에 어찌나 넋을 놓고 있었던지 누군가 내 가방을 여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에 유리에 비친 나를 봤는데 가방이 활짝 열려 있는 게 아닌가. 과장 조금 보태서 정말 기절할 뻔했다. 가방을 살펴보니 지갑 안에 들어있는 현금만 없어지고 나머지는 그대로였다. 그나마 지갑은 다시 가방에 넣어준 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힘든 몸에 소매치기까지 당하니 그나마 있던 기력도 다 빠져나갔다. 포르투가 그렇게 좋대서 기대했는데 이게 뭔가 싶었다. 천국과 지옥을 오간 둘째 날이었다.
셋째 날, 밖으로 나오니 눈부신 날씨가 나를 반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날씨를 온전히 즐기고 싶은 마음에 노천 카페로 향했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할아버지가 직원으로 있는 곳이었다. 포르투에 온 걸 환영한다는 말과 함께 샹그리아를 내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길을 나섰는데 리스본 호스텔에서 만나 동행했던 언니와 마주쳤다. 그리고 언니와 함께 간 맥도날드에서 만난 친절한 할머니. 나도 모르게 주문서를 떨어뜨렸는데, 상당히 멀리 앉아 계셨으면서도 나에게 걸어와 그 사실을 알려주셨다. 한국에선 좀처럼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기분이 묘했다. 이 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카페의 할아버지와 맥도날드의 할머니가 가장 먼저 기억난다.
해가 질 때까지 정처없이 걷다가 앉아서 강을 바라보는 일을 반복했다.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이 없는 작은 도시라서 시간이 많았다. 도우루 강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만 봐도 지루하지 않은 곳이었다. 해가 질 때쯤 동행 언니와 만나 야경을 보러 동루이스 다리 2층으로 올라갔다. 좋은 날씨 덕분에 전날 밤보다 더 멋진 야경을 볼 수 있었다. 좋은 풍경을 보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가난하지 않은 삶이라 했던가. 같이 왔으면 좋았겠다 싶은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마지막 밤이기에 더 눈부셨던 도우루 강의 야경.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강변으로 내려왔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버스킹을 봤다. 한 사람이 기타 치며 노래를 불렀고,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다같이 박수를 쳤고, 노래를 아는 몇몇은 함께 흥얼거렸다.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선선한 강바람과 주황빛 조명까지 어우러져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저녁 비행기를 타고 마드리드로 떠나야 하는 일정이었다. 전날 갔던 노천 카페에 다시 가기로 했다. 여전히 유쾌한 할아버지와 인사를 하고, 에그타르트와 모히또를 사서 자리에 앉았다. 멍하니 앉아있는데 갑자기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테이블에 앉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비둘기는 나를 한 번 흘끗 보더니 에그타르트를 먹었다. (일행인 줄...) 옆 테이블에 있던 포르투갈 남자가 당황한 나를 대신해 비둘기를 쫓아줬다.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비둘기는 다시 날아와 아까보다 전투적으로 쪼아대기 시작했다. 결국 에그타르트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주변의 모든 비둘기 친구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난 혼비백산해서 저 멀리 도망쳤다. 19일 간의 여행 중에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이었다... 직원 할아버지에게 무섭다고, 난 새가 싫다고 하소연을 했다. 흑흑. 할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 에그타르트를 새로 내주었다.
호스텔에 들러 짐을 챙기고, 공항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잘못 탔다. 마지막까지 삽질의 연속이었다. 공항이 종점인 건 알고 있었으니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종점에서 내렸는데 이건 무슨 허허벌판... 주변을 보니 사람이 딱 두 명 있었다.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공항에 가는 법을 핸드폰 메모장에 직접 적어주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환승역에서 내렸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근처에 서있던 시큐리티에게 가서 공항까지 걸리는 시간을 물어보니 13분. 기다렸다 타면 비행기를 놓치게 된다. 나 시간 없다고, 택시 좀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급하다는 걸 알았는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조치를 취해주었다. 택시가 도착했고, 최대한 빨리 가달라고 말하자 택시기사는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사실 여기서 좀 생명의 위협 느꼈다) 공항 근처에 오자 바로 앞에 세워주겠다며 "What's your company?"라고 물었다. 나보다 급하게 짐을 내려준 기사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체크인 카운터로 달려가니 항공사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It's okay. Calm down." 그 말을 듣자마자 긴장이 탁 풀렸다. 보딩 10분 전 도착이었다. 종점의 이름 모를 사람, 시큐리티, 택시기사, 항공사 직원까지 모두가 도와준 덕분에 무사히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렇게 포르투를 떠났다.
많은 시간을 동행 언니와 함께였던 리스본과 달리 포르투는 온전히 혼자였기에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았다. 길을 잃고, 소매치기를 당하고, 비행기를 놓칠 뻔하고, 심지어 나랑 겸상하려 드는 비둘기까지 만나는 등 19일 간 갔던 7곳의 도시 중 가장 우여곡절이 많았던 포르투. 그럼에도 가장 좋았던 도시인 포르투. 돌아보니 그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았다고 기억할 수 있는 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었다. 글에 적은 많은 사람들과 미처 쓰지 못했지만 호스텔 직원들, 지하철역에 가기 위해 탔던 택시의 기사, 도우루 강변 레스토랑의 직원까지. 꼭 필요한 순간에 마법처럼 나타나 도움을 주고, 위로를 주고, 힘을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포르투는, '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마법'으로 가득한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