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쓰다
<케빈에 대하여>를 이야기하려면, 말 그대로 '케빈에 대하여'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케빈은 그야말로 작은 악마다. 엄마에게 시종일관 적대감을 드러내고, 교묘하게 엄마를 괴롭히고, 엄마 앞에서 태연하게 아빠를 속인다. 그리고 열여섯이 된 케빈은, 집에서 아빠와 여동생을 살해한 후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학살한다. 처음 이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보고 나서 까지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나중에 저런 애 낳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였다. 달리 말하면, 케빈을 소시오패스로 여기고 모든 일들의 원인을 그에게서만 찾았던 것이다. 에바는 어쩌다 보니 아들이 소시오패스인 불행한 엄마일 뿐이라고.
하지만 영화 내용을 머릿속으로 되짚어보니 이 생각은 전제부터 틀려먹었다. '나중에 저런 애 낳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은, 나는 아이가 생기면 당연히 모성애를 가지고 그 아이를 대하리라는 전제가 깔린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엄마라면 모성애를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한 걸까? <케빈에 대하여>는 이 당연한 상식(이라고 여겨지는 생각)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그러니까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에서 케빈뿐만 아니라 에바에게도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하자고 말하고 있지만, 에바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으면 케빈에 대하여도 이야기할 수 없다.
위의 장면에서 아빠가 된 프랭클린은 활짝 웃으며 아이를 안고 있지만, 정작 아이를 낳은 에바의 표정에는 절망이 서려 있다. 표정에서 알 수 있듯 에바는 원치 않는 아이를 낳아야 했고, 그래서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없었다. 에바와 케빈의 관계는 시작부터 서로에게 불행이었던 것이다. 낳고 보니 아이가 케빈이었던 것이 에바에게 불행이라면, 자신을 원하지 않는 엄마에게서 태어난 케빈에게도 엄마가 에바인 것은 불운이다. 아이를 원치 않았던 에바의 마음은, 케빈을 대하는 에바의 모든 행동에 묻어난다. 우는 케빈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들고' 있는 모습에서, 케빈의 울음소리를 공사장의 소음으로 막으려는 모습에서, 종국엔 케빈에게 “엄마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라고 말하고 마는 모습에서. 그래서, 케빈이 에바에게 보이는 악마적 행동들은 어쩌면 나를 사랑해달라는 애원에 가깝다. "사랑하는 것과 익숙해지는 것은 달라요. 엄마도 나한테 익숙하기는 하잖아요."라고 말하는, 사랑받지 못한 아들의 비명.
그렇다고 해서 케빈이 저지른 학살을 합리화할 수 있는 변명거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엄마를 향한 애원이든 분노의 표출이든 간에, 자신의 감정 때문에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는 행위다. 또 그렇다고 해서, 에바를 도덕적으로 단죄할 수도 없다. 에바는 그저,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이 필요한 아이를 갖게 된 불행한 엄마일 뿐이다.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난 후에 드는 복잡한 감정은 이 때문이다. 케빈과 에바, 둘 중 어느 쪽에 잘못이 있다고 명료하게 결론내릴 수 없는 복잡함. 소시오패스 아들과 나쁜 엄마의 이야기로 프레임을 단순화시키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이 영화는 그리 단순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 동의할 수도, 누군가를 단죄할 수도 없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답은 내리지 못했다. 이해해보려 애쓰고 있을 뿐이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라면 공허하지만은 않은 노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