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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징니 May 15. 2017

아무런 빚도 없다고 말하기까지 우리는

영화 <언노운 걸>을 보고 쓰다


주인공 제니(아델 하에넬)는 작은 병원에서 임시 의사로 일하고 있다. 평소처럼 진료를 마친 어느날, 밤중에 누군가 벨을 누르지만 이미 진료 마감이 지난 후라 제니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날, 벨을 눌렀던 소녀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죄책감을 느낀 제니는, 예정되어 있던 좋은 일자리를 거절하고 작은 병원을 지키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죽은 소녀의 이름을 알아내어 제대로 장례를 치러주기 위한 혼자만의 수사에 매달린다.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제니의 이 행동이 소녀의 죽음에 미친 영향은 어느 정도이며, 제니가 가져야 하는 죄책감과 의무감은 어느 정도가 적절한 걸까. 제니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죽은 소녀의 이름을 알아내려 고군분투 하지만, 소녀의 죽음이 전적으로 제니의 책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병원에도 엄연히 정해진 진료 시간이 있고 의사라고 해서 그 이외의 시간까지 진료에 써야 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니가 이 사건에 대해 으레 가질 법한 죄책감의 정도를 넘어서서,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소녀의 이름을 찾는 일에 매달린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제니가 본래 지니고 있던 선한 의지의 발현, 그리고 인간애로의 확장이라고 본다. 제니는 소녀의 죽음을 알게 된 이후, 소녀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도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안정적인 일자리도 마다하고 작은 병원을 도맡고, 의사가 되기를 포기하려는 인턴을 찾아가 설득하고, 환자를 대신해 사회복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일을 처리해준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제니가 (인간으로서 느낀) 죄책감(guilt)을 (의사로서 져야 할) 책임감(responsibility)으로 슬며시 치환하고 있다'(<씨네21>, 우혜경)고 썼지만, 그 책임감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선행으로 치환된 것이 곧 인간애의 발현이라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우리는 사랑하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던 사람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난 그들에게 아무런 빚도 없어."라는 말은 아직은 나의 말이 될 수는 없다. "난 그들에게 아무런 빚도 없어."라는 말은 "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낸 후에, 다음에, 그 다음에."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정혜윤)


제니의 탐문 과정에서 소녀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드러나듯, 제니의 행동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삶이 좀 더 나아지듯, 개개인의 삶은 서로에게 어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다. 그러니까, 제니는 소녀의 죽음에 있어서 "아무런 빚도 없어"라고 말할 수 없기에, "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제니는 폭력과 협박에 시달리지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해야한다고 믿는 길을 끝까지 걸어 나간다. 사람은 대개 자신의 선함을 믿기 마련이지만 대개 그만큼 나약하기도 하다는 점에서, 선한 사람은 곧 강인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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