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노랑우비광년 009

진라면

by 소피

#진라면


트렁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의 오른손, 그녀의 왼손.


우리는 함께 트렁크 손잡이를 잡았다. 오르막길은 생각보다 길었고 팔이 아파서 조금 쉬고 싶을 무렵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마을버스 종점이 있는, 언덕 위 빌라촌 입구였다.


"고맙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다 왔나요?" 숨이 차서 대답도 겨우 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또 고맙다고 말했다.

"혹시 더 올라가야 하시면 말씀하세요." 마음에도 없는 빈말을 해버렸다.


"아... 그러면... 조금만 더..."

"아... 그러실 것 같았어요.


손이 저릿저릿하다. 괜한 말을 했나 보다.


바로 그때.

내가 그녀를 도왔으니

하늘도 감동하여 천사를 보내주셨다.


아주 커다란

천사를 내려 보내주셨다.


마동석이

나타났다.




새하얀 츄리닝을 세트로 입은 마동석이 삼선 슬리퍼에 커다란 우산을 쓰고 성난 황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아립아~! 아립아~!"


진짜 성난 황소처럼 달려오는 마동석이 소리치자 골목에 그녀의 이름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녀의 이름은 아립이었다.


아립.

이름도 참 예쁘다.


마동석은

아립을 꼭 안아주었다.


트렁크에 시체가 들어 있더라도

내가 잠시 후

트렁크 안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나는 잠시

마동석이 되고 싶었다.




"아이씨!!! 왜 전화 안 받아!!!"

"미안해, 아빠 똥 누고 있었어."


"똥 누면서 전화기 안 들고 있었어? 거짓말할래?"

"미안해. 우리 딸. 마중도 못 가고, 미안해."


"어우, 짜증 나... 엄마는?"

"엄마는 지금 라면 끓여... 어서 가서 먹자."


"무슨 라면!!!?"

"진라면밖에 없어서... 미안해. 우리 딸."


"아오. 진짜 짜증 나네."

"미안해... 진라면이 할인을..."


"진? 진? 아오. 진짜. 신라면 블랙 먹고 싶다고 했어 안 했어?"

"아빠가... 안 그래도 지금..."


"됐어. 안 먹어. 짜증 나."

"아직 라면을 안 넣었으면..."


"싫어, 늦었어!"

"... 그래. 다음에는 아빠가..."




아립이는 말도 참 예쁘게 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목소리

그녀가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나는 빠져들었다.


멀뚱멀뚱과 행복행복이 섞인 감정으로 나는 그들을 보고 있었다. 저릿한 팔을 어루만지며 서 있는 내 앞에서 선녀인지 천사인지 모를 새하얀 마동석과 방금 내가 도와준 맑은 눈빛에 칼자국을 가진 소녀가 매우 평범한 딸바보 아빠와 입이 거칠지만 애교스러운 딸이 할 법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으니, 마치 내가 그 가정에 사위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내가 늘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라면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뒤늦게 내 뻘쭘한 존재를 느끼고 대화를 중단했다. 마동석과 그녀가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누구...?"


마동석이 이제야 나를 경계하며 노려보았다.


방금까지 딸바보 어미 소 같았던 맑은 눈망울은 사라지고, 레드불에 핫식스를 말아먹은 성난 황소 같은 눈빛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비슷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들과 잠시 같이 있어 봤던 경험 덕분인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새하얀 츄리닝이 마동석 몸에 너무 작아 보여서 웃음이 난 것도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모를 오해가 있을까 봐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려고 입 모양에 신경 쓰며 마동석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아빠 아빠. 이분이 여기까지 트렁크 끌고 오는 거 도와주셨어…"


그녀의 말 한마디 덕분에 마동석은 다시 착한 아빠로 돌아갔다. 그녀는 나의 공로를 인정하고 제대로 전하려는 듯 잠시 짜증을 멈추고 매우 공손한 태도로 아빠에게 설명해주었다.


트렁크가 넘어진 이야기, 택시가 트렁크를 밟을 뻔했던 이야기 등 내가 관여했던 부분의 이야기가 상세히 전해지자 마동석도 예의를 갖추며 다시 인사했다.


"아이구,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아... 아하하... 별말씀을요. 도움이 필요하실 것 같아서... 아하하..."

"아빠, 요즘 세상에 초면에 이런 일 도와주기 쉽지 않을 텐데, 정말 고마운 분이셔."


마동석이 갑자기 끼어들었지만, 나는 어느 정도 좁혀진 그녀의 거주지와 동선을 파악했으니 충분히 목표를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훈훈하게 대화가 마무리되면 잘 들어가시라고 말하며 당장 어색한 이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마동석은 대화를 끝내기가 싫었던 것 같다. 마동석은 한참을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커다란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탁' 치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아립아~ 아립아~ 여기 이분. 우리랑 초면이 아니시구만!"

"네? 아빠 아는 분이세요?"


큰 천사는

머리도 크고 뇌도 큰 것일까?


마동석은 금방 나를 기억해냈다.


그래, 좋은 추억이었지. 나도 마동석과 같은 추억에 잠시 빠졌다가 하필이면 뜨거운 눈물의 순간이 떠오르며 부끄러워져서 급히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녀의 곁으로 갔고 그녀를 도와주긴 했지만, 다행히 나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마동석의 타이밍 구린 기억력에 불편한 자리가 되고 있었다.


"그분 맞으시죠? 편의점? 맞는 것 같은데..."

"아... 하하... 편의점 맞습니다."

"그래!! 그래!! 맞다니깐!! 편의점에서!!"


마동석이 신나게 끼어들어 아는 척을 남발했다.


"오잉? 그러네? 맞네!"

그녀도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날 잘 들어가셨어요? 해장도 잘하셨고요?"

"아... 하하...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잘 들어갔습니다."


마동석은 대뜸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늦은 시간에, 비도 오는데, 우리 딸 도와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작별 인사가 되길 바라며 정성껏 대답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아하하.. 두 분, 어서 라면 드시러 가셔야죠. 저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녀가 갑자기 마동석의 어깨를 찰싹 후려치며 말했다!


"아! 맞다. 아빠, 아빠, 라면!!"

"으아, 그래. 라면!"

"퍼지겠다!!"

"진라면인데..."


라면으로 시작된 대화는 라면으로 마무리되면서 우리는 서로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또 하며 헤어질 채비를 했다. 그녀와 나의 제대로 된 두 번째 만남은 호들갑 속에 끝나고 있었다.


마동석은 "읏차" 소리를 내며 트렁크 손잡이를 잡았고, 커다란 트렁크는 언제 무거웠냐는 듯 돌돌 거리며 오르막을 가볍게 따라 올라갔다.




어두운 골목, 내리막길을 걸으며 또 생각을 정리했다.


무섭지만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칼자국 소녀에 대해 더욱 궁금해졌다. 아빠 마동석도 좋은 사람 같았고 그 시간에 가족을 위해 라면을 끓이는 엄마도 아직 만나보진 못했지만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김치를 꺼내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너무 예뻤다.


그녀는 왜 미친년이 되었을까?

그녀는 왜 맑은 날 우비를 입고 달렸을까?

오늘은 왜 비가 오는데 우비를 입고 나타났을까?


내 마음을 전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월요일 아침에

꼭 그녀를 만나자.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장마노랑우비광년 010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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