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노랑우비광년 008

어른 한 명

by 소피

#어른 한 명


어두운 골목으로 노란색 그녀가 힘겹게 움직이고 커다란 트렁크가 비틀거리며 그녀를 뒤따르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가 끝나고 매우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되기 직전, 그녀와 트렁크가 멈췄다. 나는 조용히 멀리서 그녀의 뒤를 밟았다.


사시미칼을 돌려주며 내 마음 담은 편지를 주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갑자기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지금이라도 뛰어가서 집에 있는 종이가방을 가져올까? 아니야. 오히려 지금이 기회일 수도 있겠다. 지금 조심스럽게 그녀를 따라가다 보면 어디에 사는지 대략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월요일 아침에 일찍 나와서 기다리다가 달리기를 시작하는 그녀를 만나야겠다. 그녀도 땀에 흠뻑 젖은 채 사랑의 편지를 받기는 싫을 거야. 아, 내가 또 앞서가는구나.


지금은 일단 내 앞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집중!


그나저나 트렁크가 너무 크고 무거워 보인다. 가끔 공항에서 외국인 가족이 저렇게 큰 트렁크에 아이들까지 태우고 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아내와 아이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아빠만 창백한 얼굴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표정이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저렇게 혼자 감당하지도 못할 트렁크는 왜 끌고 다니는 거야?


잠시 후. 그녀는 잠시 주변을 살피다가 다시 트렁크 손잡이를 잡고 힘껏 끌어당겼다. 이번에는 제법 많이 올라가나 싶더니, 트렁크는 덜컹거리며 다시 처음 멈춰 있던 자리로 미끄러져 돌아갔다. 그녀가 트렁크를 끄는 건지 트렁크가 그녀를 끌고 다니는 건지...


끙끙거리는 모습이 약간 안쓰럽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는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조금 더 가깝게 보고 싶어서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고 그녀가 잘 보이는 과일가게 천막 아래에서 우산을 접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나저나 그녀는 저렇게 큰 것을 어디서부터 끌고 온 거야? 아빠하고 얼굴은 닮지 않아도 팔 힘은 유전인가? 대단하다. 대충 봐도 자기 몸보다 더 큰 트렁크인데! 내가 본 트렁크 중 가장 큰 사이즈로 보이는 그것은 어른 한 명이 들어가도 충분할 것 같았다. 아…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정말 그러면 안 되는데, 또 좋지 않은 상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트렁크에...

어른 한 명이...




그녀는 트렁크를 그대로 세워 둔 채로 길가로 자리를 옮겨서 전화기를 꺼냈다. 기울어진 바닥에 트렁크가 서 있는 자세가 뭔가 불안해 보이더니 불룩한 트렁크는 기우뚱하더니 결국 텅 소리를 내며 넘어지고 말았다. 쓰러져있는 트렁크를 보며 그녀의 표정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녀는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으며 미간을 찡그리며 우비의 소매를 걷어붙였다.


순간...

편의점에서 보았던 바로 그 칼자국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


트렁크에...

진짜...

어른 한 명이...


정말


어른 한 명이...

들어갈 수도 있겠다...


다시 내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내 옆으로 택시 한 대가 예약등을 켜고 급히 올라갔는데 넘어진 트렁크를 발견하고 급히 멈췄다. 어둠 속에서 그 시커먼 트렁크를 발견한 기사님의 동물적 감각이 아니었다면 사고가 났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놔, 식껍했네. 이것 좀 치워요!"

택시 기사님이 창문을 내리고 소리쳤다.


그녀는 트렁크 쪽으로 가다가 다시 운전석 창문 쪽으로 가더니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고막으로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떨리는 마음으로는 이미 두 사람의 숨 막히는 대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여보시요. 기사 양반, 뭐가 문제요?"

"가방인지 뭔지 좀 치워달라고 말씀드리잖아요."


"하... 피해서 가면 되잖소."

"뭐요? 젊은 아가씨가 싸가지가... 지금 뭐라고 했어?"


"하... 이 아저씨..."

"경찰 부를까? 어?"


"경찰?"

"그래, 지금 경찰 부른다!"


"아저씨..."

"뭐! 왜?"


"운전석에 앉아서 디지고 싶어?"

"…"




두 사람의 무서운 대화가 생생하게 들리고 있었다. 내가 가서 말려야 하나, 도와줘야 하나... 아니야... 끼어들지 말자... 아니야... 운전석에 앉은 채로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지...


온갖 고민 속에 방황하는 순간, 기사님과 대화하던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강력한 눈빛을 보내며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분명히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멀고 어두웠지만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나를 불렀다.


나는 당황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그녀는 손목은 더욱더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기요! 저기요!"

"..."


내가 대답도 못 하고 서 있으니 그녀는 내가 있는 곳으로 내리막을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가 내 앞에 도착했다. 이제는 진짜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내가 아는 그녀가 확실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울먹이고 있었다.




"저기요. 죄송한데… 좀 도와주세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택시 쪽으로 가리키며 나를 쳐다봤다.


"... 아... 넵. 네넵."


마동석에게도 그랬었던 것 같고, 지금 그녀에게도 텍스트로만 쓰던 '넵, 네넵'을 입으로 말하고 있는 내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 짧은 시간에 그런 내 모습에 반성하면서 동시에 웃겨서 마음속으로 웃으며 허둥지둥 그녀에게 이끌려 택시 앞으로 가고 있었다.


"이게 넘어졌는데, 너무 무거워서…"

그녀가 애원하듯 말했다.


택시 기사님은 운전석에 앉아서 담배를 물고 있었고 방금 끌려온 나를 보더니, 창문을 닫으며 후진으로 살짝 차를 빼주셨다.


정신을 집중하고

상황을 다시 돌아보니


그녀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같았다.


착각이거나

환상일 수도 있지만


모유를 먹지 못하고

분유에 의존하여 자랐던

내 몸에 존재하지 않았던

젖 먹던 힘까지 솟아나고 있었다.




트렁크 손잡이를 힘껏 붙잡고 잡아당겼다. 마음은 뻔한데 트렁크는 너무… 예상보다 훨씬 더 너무너무 무거웠다. 멋지게 트렁크를 휙 치워주고 싶었지만 현실은 끙끙거리며 겨우 밀어내고 있었다. 그녀도 나를 도와주려고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그녀의 손이 살짝 내 손에 닿았다. 트렁크도 한 번에 못 밀어내는 이런 한심한 상황에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내 심장은 정말 바보같이 크게 두근거렸다.


택시는 떠나고, 비 내리는 오르막길에 그녀와 나 둘이 남았다.


그녀는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내 심장은 두근거리고, 우리 옆으로 차가 지나갈 때마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중 그녀의 표정이 말하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아쉬움 같았다. 무엇이 지금 이렇게 그녀에게 아쉬움을 남기고 있을까?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중, 그녀가 직접 정답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휴. 택시 기사님을 괜히 보내드렸나 봐요."

" …?"


하지만 나는 또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상상 망상 공상에 빠지고 있었다. 죽여버릴 것을 그냥 살려 보낸 것이 너무 아쉬운 것인가? 지금 나는 그녀와 같이 여기에 서 있어도 되는가?


"저기요. 죄송한데."

"... 네?"


"너무 죄송한데, 트렁크 좀 같이 옮겨주실 수 있을까요?"

"... 아..."


"방금 도와주신 것도 너무 감사한데. 죄송해요."

"... 아... 어디까지...요?"


"죄송해요. 저희 집 근처까지 한 번만 도와주시면 제가..."

"아... 넵."


대답해버렸다. 일단 대답은 했다. 내 힘으로 끌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녀의 집이 얼마나 멀리 있을지도 모르겠고, 어두운 골목으로 그녀와 동행하는 것이 괜찮은지도 모르겠고,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되지 않지만 대답했다.


그녀가 우비 모자를 고쳐 쓰려고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마침 지나가던 배달 오토바이의 불빛에 그녀의 팔에 있는 커다란 칼자국이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아까 그녀는 택시 기사님과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설마 이 모든 것이 나를 이곳으로 유인하기 위한 계획이었나? 나를 왜? 트렁크 안에 정말 시체가 들어 있다면? 아니면 내 시체를 넣기 위한 트렁크였다면?



장마노랑우비광년 009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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