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맑은 날
몸살 기운과 함께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3일 만에 전화기에 전원을 켰다. 술 마시다가 말없이 도망친 후배가 걱정되었던 착한 회사 선배들의 부재중 전화와 도망친 놈이 전화도 안 받는다며 더욱 걱정스럽게 쌍욕을 담아 보내준 월요일 살인예고 문자가 가득 쌓여 있었다.
일기예보는 틀렸다.
월요일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씻고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창밖으로 보이던 것보다 빗줄기는 굵고 바람도 제법 불고 있었다. 현관에 미리 챙겨놓았던 작은 종이가방을 챙기고 집에 있던 낡은 우산 하나를 펼쳐 들었다.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최대한 빨리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겨웠던 금요일 밤.
무서웠던 토요일 새벽.
오후만 있던 일요일.
편의점 앞에서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떠올려 보았다.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간중간 필름도 끊어지고 자세한 상황까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몇 가지 강렬했던 것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빠의 잉어
그녀의 칼자국
흐르던 뜨거운 눈물.
그리고
그녀가 준 사시미칼
최대한 늦게까지
그녀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늘 달리지 않았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그녀도
장마와 함께 사라졌다.
지긋지긋한 장마는 열흘이 넘게 계속되었다. 잘 말려서 보송보송한 예쁜 사시미칼을 담았던 종이 가방은, 매일 집과 회사로 들고 다녔더니 가장자리가 많이 닳았다. 매일 아침 버스정류장, 매일 저녁 그때 그 편의점 주변을 맴돌며 우연한 만남이라도 기대했지만 결국 그녀와 마주칠 일은 없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았다. 그녀의 행동이 조금 이상해도,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욕하더라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침마다 귀엽게 달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설레고 행복했으니까.
조금씩 빠져들었다. 그녀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주변의 시선이나 소문에 신경을 끊으려 노력했지만 나도 모르게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스스로 괴롭고 답답해졌다. 그래서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일단 내 마음이라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다. 그 후에 일어날 일이라 해 봤자 겨우 3가지 결과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케이스1.
그녀가 조금 이상해도 정상이라면. 그저 맑은 날에만 우비 입고 달리기를 좋아하는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내 고백에 흥미가 생겨 웃어주든, 당황해서 울어버리든, 재수 없어하며 똥 씹은 표정으로 그 자리를 떠나든 결정될 일이었다.
케이스2.
그녀가 정말 미친년이라면 나도 그 자리에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나도 '아! 정말 제대로 미친년이었구나.' 판단하고 즉시 포기하든 아니면 동정심이라도 생겨서 아침마다 그녀의 모습을 지켜봐 주며 묵묵히 응원하는 사람이 되든. 뭐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될 것이었다.
케이스3.
마지막으로 그녀가 정말 소문처럼 무서운 사람이라면 내가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을 당하든, 나중에 어디로 끌려가서 감금을 당하든, 감금을 당했다가 실종되든 좀 복잡해지는데 사실 케이스3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리 무서운 사람이라도 주변에 사람도 많은 곳에서 작고 귀여운 소녀에게 대한민국 육군 병장 전역 예비역이 죽기라도 하겠는가 정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날 새벽 이후.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평소 그 누구보다 소극적인 성격의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겠다고, 고백하겠다고 결심하는 것 자체가 워낙 어려운 일이었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과정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흐지부지된 것도 내 못난 성격 탓인 것 같아서 자책하게 되었다.
나는 늘 이랬지.
정말 바보 병신 같아.
장마 덕분이라고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매일 아침 그녀가 달려 지나가던 길을 바라보며 그녀가 웃으며 달려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차분하게 내 마음을 제대로 정리해볼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 같았다. 아침마다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기다렸다.
1. 그 사람을 좋아해?
맞아. 좋아하는 감정이야.
2. 그 사람에 대한 소문을 믿어?
믿지는 않는데…
3. 그 사람이 무서워?
처음에는 그냥 이상한 정도였는데
지금은 혼란스러워. 솔직히 무섭기도 해.
4. 그럼 포기하고 끝내.
…
5. 그럼 뭐? 어쩌자고. 바보 쫄보야.
그러게. 나도 답답해.
6. 맘대로 해.
그래. 말은 걸어보자.
후회하기는 싫어.
우산도 돌려줘야 하잖아.
7. 그래 후회는 하지 말아야지.
그래. 맞아.
8. 파이팅. 죽더라도 아름다운 죽음 아니겠어?
…
이런 자책과 용기가 교차하는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장마전선은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다가 서서히 소멸하고 있었다. 장마가 끝나고 그녀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날을 기다렸다. 직접 말하기는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그녀를 세워놓고 제대로 말도 못 하거나 정말 바보 같이 어버버 거리다가 스스로 도망갈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정말 유치하지만, 손편지를 쓰기로 했다. 길게도 써보고 짧게도 써보고 쓰고 버리고 쓰고 지우고 다시 읽었다가 다시 버리고, 드디어 완성한 짧은 편지. 새로운 종이 가방에 우산과 편지를 넣었다. 그리고 장마가 끝나고 맑은 하늘이 보이길 기다렸다.
다시 주말.
이번 주말을 끝으로 기나긴 장마가 끝난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그녀를 만나면 된다.
하지만
세상은 참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흐름. 그런 것을 운명이라고 부르던가.
일요일 저녁.
아직 비가 내리고 있는데...
그녀가 노란색 우비를 입고 내 앞에 나타났다.
비
오
는
날
우
비
를
입
은
그
녀
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아직 나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어두운 골목으로
커다란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가고 있었다.
장마노랑우비광년 008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