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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왕 Jan 30. 2017

복싱, 그 매력적인 이름

“왼쪽으로 돌아서 빠져나와야지! 붙으면 어퍼! 몸에 힘빼고!!”

링 밖에서 주문을 넣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몸은 고장난 핸드폰 자판처럼 오작동을 일으켰습니다. 상대방의 쏟아지는 펀치에 저 역시도 받아쳐야겠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초반부터 강한 펀치가 얼굴에 꽂혔습니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힘은 잔뜩 들어갔고 평정심을 잃고 동작이 큰 펀치들만 나왔습니다. 

제가 들고 나온 전략은 철저한 아웃복싱이었습니다. 상대방 주위를 인공위성처럼 빙빙 돌다가 빈틈이 보이는 순간에 파고들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궤도를 벗어난 인공위성이 돼버렸습니다. 



때는 2016년 5월, 제6회 관악구청장기생활복싱대회가 서울 관악구민 체육센터에서 열렸습니다. 초등학생부터 50대 성인부까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복싱에 대한 열기가 체육관을 가득 메웠습니다. 프로선수들의 경기도 7경기 진행됐습니다.

백 여명이 넘게 출전하는 큰 대회는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75kg 이하 남자부에 출전을 했습니다. 

‘원투 스트레이트 이후 레프트바디로 끝내야지’

대회 전까지 무수히 돌려봤던 게나디 골로프킨(현 WBA 슈퍼 미들급 챔피언)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다시한번 보며 그의 필살기를마음 속에 새겼습니다.



새벽에 도착해 계체를 끝내고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선수들은 경기복으로 갈아입고 줄넘기를 하거나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일찌감치 옷을 갈아입고 준비했습니다. 

차례가 다가오자 점점 긴장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토록 궁금했던 상대 선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상대는 저보다 몸도 좋고 강해보였습니다. ‘성난 황소.’ 처음 떠오른 생각입니다. 마침 제 경기복은 투우사의 붉은 망토와 같은 빨간색이었습니다. 

차례가 왔고 매일밤 꿈 속에서 치뤘던 수많은 경기들을 곱씹으며 링 위에 올랐습니다. 

‘땡’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경기는 1분30초, 2라운드로 진행됐습니다. 고작 3분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테지만 이 3분이 링 위에 오른 사람에게는 몇시간처럼 느껴집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왼손을 가볍게 뻗어!’라고 뇌가 명령했지만 오른손이 거대한 원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습니다. ‘백스텝 밟고 스트레이트(흔히들 슥, 빡 이라고 표현합니다)’를 던지라고 주문을 내리지만 몸은 오작동을 일으킨 기계처럼 말을 듣지 않습니다. 



계획에 없었던 치고 받는 난타전 끝에 마침내 경기가 끝났습니다. 링 중앙에서 상대 선수와 인사를 나눈 후 판정을 기다렸습니다. 아쉽게(?) 상대방의 손이 올라갔습니다. 제 도전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동시에 크고 작은 대회를 출전하면서 쌓아올린 무패의 기록이 결국 깨지고 말았습니다.(체육관에서는 ‘무패복서’로 불렸습니다.) 

움직일 힘도 없이 모든 것을 쏟아낸 경기였습니다. 마침내 끝났다는 묘한 성취감을 뒤로 하고 아쉬움이 몰려왔습니다.

‘지금 다시하면 이렇게 졸전을 펼치진 않았을텐데.’ 준비한 것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책망이었습니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대회는 밤 10시가 되서야 끝이 났습니다. 오전에 일정을 마감한 저는 한켠에서 경기를 차분히 관전했습니다. 어느 하나 빼놓을 것 없이 아름다운 승부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롯이 두 주먹으로 누구의 노력이 더 컸는지 겨루는 모습을 보며 숙연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대회가 끝나고 다시 한번 복싱에 매료됐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링 위에서 노력의 크기에 따라 결과가 결정됩니다. 단순하지만 가장 공정하고 명확한 룰입니다. 그것이 복싱이라는 스포츠에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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