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 척'과 이별하기
지금보다 몇 년 더 어렸을 때, 내 입버릇은 '미안한데'란 말을 꼭 붙이는 거였다.
"미안한데, 나 거기 옆에 휴지 좀"
"미안한데 전화 좀 해줄래?"
"미안한데 카톡 좀,,,"
"미안한데..."
어느새 나는 고맙다는 말보다 미안하다는 말을 더 자주 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할까? 가만히 따져보면 딱히 미안할 것도 없는 일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 1초의 부탁이 누군가에게 성가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을 붙였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내 눈 앞에 있는 휴지 한 장을 뽑아다 주는 게 그리 성가신 일도 아닌데. 20대 땐 그런 것조차도 남 눈치를 봤던 거였나.
하루에도 몇 번씩 남발하는 미안하다는 단어는 참으로 얄팍했지만 은근히 나를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말의 힘'이었다. 나는 늘 미안해하는 사람, 남들이 나를 조금이라도 무례한 사람으로 볼까 봐 눈치 보고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랬던 나를, 드디어 '미안하다는 말'의 굴레에서 조금이나마 해방시켜준 사건이 있다. 몇 년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 친구와 나는 참 친했다. 무려 중학교 때부터 이어진 우정이었다. 성인이 되고 난 후부터 우리는 같이 서울 생활을 하면서 적어도 주에 한두 번은 늘 보는 가족 같은 사이가 돼 있었다. 성격의 결은 좀 달랐으나, 밤새 술을 마셔 떡이 된 친구의 주소를 굳이 묻지 않고 데려다줄 수 있는 정도의 사이였다. 우리는 모든 연애사와 고민거리를 함께 공유했고 가족보다 더 자주 보는 '절친'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녀에겐 한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충고랍시고 던지는 말들이 굉장히 날카롭다는 것이었다. 그 단점은 물론 나에게도 적용되었다. 늘 서로 틱틱거리며 아웅다웅하던 우리였지만 그날은 좀 달랐다. 그녀가 나를 작정하고 질타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가 우리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너무 섭섭해."
"네 선택은 잘못됐어."
그녀는 단지 내가 친구 사이임에도 무언가 비밀스러운 부분이 있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었다. 당시 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정말로 잘못한 걸까? 미안한 일을 만든 걸까? 이런 싫은 소리 듣고 싶지 않은데. 이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은데...
그저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난 고민 대신 되는대로 내뱉었다.
"서운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
그땐 몰랐다. 말에도 힘이 있고, 잘못 휘두르면 그 무게에 눌린다는 걸.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실 그것은 미안할 게 아니었다. 나는 단지 친구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게 두려웠고, 나를 고까운 눈으로 보는 게 싫었기 때문에 '미안한 척'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왜 그랬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뭐가 미안해서, 그렇게 무턱대고 미안하다는 말을 했을까.
결국 나는 그녀의 연락을 점점 받지 않게 되었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내가 무턱대고 뱉은 미안하다는 말에 대한 짜증과 화, 후회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나를 억지로 미안하게 만든 그녀가 미웠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와 나의 찬란했던 십몇 년의 우정은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더 이상 미안하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자 다짐했다. 친구라는 이름 아래 나를 몰아세우는 그녀에게 화가 난 것도 맞지만, 남의 눈치를 살피느라 진심도 아닌데 미안하다고 내뱉어 버리는 나 스스로에게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기왕 꺼내는 말이라면 진심을 담아서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저 침묵하자고 했다. 진심이 아니라면, 무엇보다 제일 견디기 힘든 건 나 자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