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지 못했던, 하지만 너무나 익숙한 가스라이팅
우리는 어릴 때부터 "훌륭한 사람이 돼라."는 말을 귀에 피가 날 정도로 들으며 자라왔다. 그런데 정작 그 '훌륭한 사람'의 정의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알려준 기억이 없다.
훌륭한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의사, 변호사, 판사 같은 소위 '사'자 직업을 가진 사람인가? 아니면 우리 세대의 어린 시절 장래희망 순위권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과학자, 대통령 같은 나라와 인류 발전에 이바지할 거라고 여겨지는 직업을 가진 사람? 요즘에는 그 자리를 공무원, 아이돌, 유튜버 등이 대체하고 있으니 그런 직업군을 가진 사람인가?
아니면 도덕적 기준에서 '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 돼라"는 말을 많이 들었던 것과는 상반되게, 우리는 응당 그렇게 되도록 기대받았던 그 '훌륭한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는 명확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롤모델을 본 적도 없다.
훌륭한 사람이 돼라는 그 말 자체가 나쁜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내 자식, 내 조카, 아끼는 아이가 자기 앞가림 잘하고, 사회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말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했던 어른들, 혹은 지금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훌륭한 사람입니까?"
이 말에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다. 설사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해서 당신을 탓하려는 건 아니다. 나 역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봤을 때 내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훌륭한 사람인지는 모르겠고, 그저 남에게 손해나 폐 끼치지 않고 내 할 도리 하며 사는, 평범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을 따름이다.
우리가 '훌륭한 사람'의 조작적 정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범주가 달라지겠지만, 만약 그 '훌륭한 사람'의 기준이 사자 직업이나 대통령, 과학자, 인기 연예인 등 사회적으로 유명하고 성공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라면, 안타깝게도 우리들 중 대다수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랄 우리 아이들도 미안하지만 대부분은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부와 명예, 권력이라는 소위 '성공'의 척도에 해당하는 잣대를 놓고 볼 때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와 명예, 권력의 속성 자체가 '희소성'으로부터 그 가치가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누구나와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부나 명예, 권력이 아니다. 성공의 기준도 아니다. 그저 '평범함'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 통념상 훌륭한 사람의 기준을 부, 명예, 권력과 같은 외적 평가기준에 놓고 모두가 그 기준을 충족하기를 기대한다. 내 아이가 부디 피라미드의 정점에 오르기를, 종속당하는 삶보다는 지배하는 삶을 살기를,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런 기대 속에서 각 개인이 가지는 '고유성'이나 '다양성'이라는 가치는 간과되기 쉽고, 존재로서 무조건적으로 사랑받는 것이 아닌 성취에 기반해 그에 대한 보상으로써 사랑을 얻는 조건적 사랑과 수용을 경험한다. 우리들은 어릴 때부터 평가받고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살아왔고, 우리도 모르는 새 그런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대물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부모-자식 사연 중에는 부모가 못 이룬 꿈을 자식이 이루기를 바라면서 자식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운 사례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자신도 못 이뤘으면서 자식은 이뤄주기를 바라는 비현실적 기대가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서 사랑받아야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꿈을 빙자한 성취에 대한 기대와 압박을 사랑과 맞교환하는 거래가 부모-자식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다.
홉스는 자연 상태의 인간이 사회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어떻게 자신의 권리와 주권의 일부를 내려놓고 사회의 질서와 규율 속에 들어가는지 설명하면서, 어떠한 규칙이나 도덕도 없이 야만성에 따르는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명명했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이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다. 우리에게는 잘 짜인 도덕 규칙과 사회적 관습, 규범, 체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투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자신의 자신에 대한 인정 투쟁'이다.
수십수백 번도 더 들은 "훌륭한 사람이 돼라"는 말은 어느새 내재화되어 우리의 의식과 도덕 구조를 지배하는 하나의 계명이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더 이상 누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아도 늘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고, 무엇이 되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타인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한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무엇이 되지 못한 나,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나, 그럴싸한 타이틀로 나의 정체성을 규정지어줄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나는 가치 없는 잉여인간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화려한 불빛 속에 무모하게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내가 달려가는 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 채 늘 자신을 채찍질하기 바쁘다. 쉬고 있는 나는 무언가 잘못된 사람인 것 같은 부적절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건만 마치 중고등학교 입시 위주 교육에서 항상 정답만을 좇았듯 인생에도 정답이 있고 그 경로를 벗어나면 아웃라이어(outliers)가 된 것 같은 부담과 죄책감을 느낀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 중 거의 대다수는 평생 이런 내적 센서를 작동시키며 살고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 중 하나이면서도 휴가는 매우 짧고,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지켜지지 않는 곳도 많다.
우리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 '열심히 사는 것'에 집착하는 이유는 아마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인적자원 하나로 이만큼 성장했던 사회경제적, 역사적 배경이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나라들처럼 천혜의 자연을 활용한 관광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미국이나 유럽처럼 산업혁명, 금광개발을 통해 경제적 발전이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난 것도 아니다. 일본처럼 개항을 일찍 하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이른 근대화를 이룩하지도 못했다. 불과 100년 전 우리는 식민지였고, 70년 전에는 전쟁을 겪고 있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인적자원' 하나로 이만큼 성장했으니 우리가 쉬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게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생산성'과 '성취', '기여'가 가장 큰 가치가 되는 사회에서는 존재 자체(being)로서 수용받는 경험, 각 개인의 고유성과 다양성이 존중받는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늘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산다. 하지만 그런 끝없는 인정 투쟁 속에서 혹시 지치진 않았는가? 쉬고 싶은데 쉬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우리는 오늘도 쉴 새 없이 쳇바퀴를 굴리는 데만 연연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세 번 크게 말해주자.
"나는 나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고, 사랑받기에 마땅한 존재다.
무엇이 되려 하지 말고, 나로 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