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은, 정이용 만화 『진, 진』
공동작업물인 『진, 진』에 대해 두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진, 진』은 삶의 ‘다함(盡)’과 ‘나아감(進)’을 담은 이야기다. 진아와 수진 두 여성이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삶이 다하는 순간들, 그 뒤에 남겨진 생, 그리고 그 속에서 또 나아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작품이다. 작품 속 진아와 수진은 나이와 직업이 다르지만 각자의 생활에서 겪는 생과 사의 무게는 어쩌면 비슷하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두 여성의 하루들을 그리면서 나와 닮은 오늘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이 만화에 대한 신간 안내를 온라인 서점에서 보았을 때, ‘고독사’나 이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불합리함에 대한 이야기겠거니 하고 짐작했다. 표지의 두 인물은 묘하게 닮았고, 둘 다 썩 밝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다. 책의 스토리 또한 이들의 표정처럼 밝지 않은 게 사실이다. 생활환경과 연령, 이름까지 모든 게 다른 두 여성이지만 어딘지 닮은 그들의 삶. 두 사람의 삶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형식으로 만화는 전개된다.
진아는 부모 없이 동생과 단둘이 자라, 동생만은 대학을 졸업시키겠다는 가장의 마음을 가진 여성이다. 낮에는 청소용역 업체에서 일하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여성전용 고시원에 살고 있다. 밤낮없이 일하면서도 동생에게 많은 용돈을 쥐여주지 못하는 것을 마음의 부채로 느끼는 인물로 청년층의 어두운 면을 다층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야기 속에서 진아의 삶 역시 볕들 날 없는 고시원 방처럼 답답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려 최선을 다해 사는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수진은 남편과 일찍 사별한 뒤, 공무원인 외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중년 여성이다. 갱년기 증상인 줄 알고 찾아간 산부인과에서 예상치 못한 ‘임신’ 소식을 마주한 뒤 충격을 받는다. 이제 아들도 다 키웠겠다 자신의 삶만 잘 꾸리며 노후를 지나가면 될 줄 알았는데, 호르몬의 영향인지 주변의 환경 탓인지 예민하다. 애인이었던 남자의 책임감 없는 모습에 질리고, 하나 있는 아들의 속도위반 소식에 예비 며느리에게 빚을 지는 것만 같은 중년이다.
『진, 진』 속의 두 인물은 서로 일면식도 없이 스쳐 지나간 인연일 뿐이지만, 이상하게 닮았다.
책을 한 번 다 읽은 후에, 두 인물이 겹치는 장면이 더 있진 않았는지 다시 책을 펼쳐 찬찬히 읽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어둡고 암울한 현실을 담아내 무거운 마음 너머로, 수진이 서예로 써 내려간 두 글자가 바로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盡進]. 음이 같은 두 한자는 각각 ‘다함(盡)’과 ‘나아감(進)’이란 뜻이다.
생은 누군가에겐 짧고 누군가에겐 지독히 길다. 그럼에도 각자 생은 진심을 다해 살아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기에 빛나는 것이 아닐까. 책장을 넘기는 내내 어딘지 어둡고 답답한 마음으로 꽉 막혔던 가슴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은 기분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던 것은 진아의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인지,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내겠단 다짐을 하던 수진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피어오를 날이 있을 것이란 희망은 확실히 보았다.
창비에서 출간한 만화를 세 편인가 보았다. 『그림을 그리는 일』과 『진, 진』이 기억에 남는다. 읽는 내내 즐겁고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남는 장면들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창비 서포터즈 활동을 위해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