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nia Jun 23. 2020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에디터는 이름을 남긴다

여행잡지 에디터 9일 차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그런 의미로, 우리 잡지는 아직 한참 멀었다.


오늘부터 마감까지는 외부에서 원고가 끊임없이 들어올 것이다. 모 대학 교수, 해외 관광청, 각종 정부 기관의 원장 등 사회에서 저명한 이들의 원고가 회사 메일을 통해 도착한다. 커버 스토리나 칼럼 등 본인의 글솜씨로 버무릴 수 있는 중요 기사들은 팀장님의 차지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찌끄레기(!) 기사들은 대부분 내 몫이다.


이토록 유명한 인사들의 원고가 왜 '찌끄레기'냐고?

물론 독자들에게는 유익한 기사가 될 테지만, 편집자인 나에게만큼은 소용없기 때문이다. 


우리 잡지에는 광고나 달력을 제외하고 총 11개 코너가 있다. 물론 광고나 달력 자료도 내가 모으고 편집한다. 이제는 회사에 없는 사수를 대신하여 7개 코너를 내가 맡게 됐는데, 그중 6월호를 기준으로 내 이름을 박을 수 있는 기사는 2개뿐이다.


외부 원고는 종류가 다양하다. 분량도 적고 내용에 손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는 반면, 처음부터 끝까지 통으로 영어로 적혀 있어 번역부터 교정 및 교열까지 내가 도맡아야 하는 것도 있다. 전자의 경우, 백번 양보해서 편집자인 내 이름 석자 따위 박히지 않아도 괜찮다. 솔직히 이것도 납득이 가지 않기는 하지만. 그러나 후자의 경우, 어째서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것인지 정말 의문이다.


내가 큰 걸 바라는 건가?


2n 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왜 이 회사에서는 당연하지 않을까?

지금은 회사를 나간 내 사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나?

‘내 이름 남겨달라.’ 요구는 했으나 대표의 압박에 못 이겨 포기한 것은 아닐까?


온갖 생각이 다 들지만,

조만간 대표와 담판을 지을 생각이다. 월급이 작다면 내 이름이라도 남겨야겠다고. 호랑이도 한다는데 내가 못 남길 게 뭐람.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에디터는 이름을 남긴다.

작가의 이전글 7,000원의 행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