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의 역설: 창조가 태동하는 침묵의 문턱

권태는영혼이자신을증명하기위해드리운, 가장고요하고도엄격한 안개이다

by Henri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에 오래 머물면 서늘한 불안이 스며든다.

해야 할 일은 그대로인데 마음은 그쪽으로 향하지 않는다.

세계의 시계는 움직이지만 나만 정지한 듯한 기묘한 감각,

우리는 이를 권태라 부른다.

그러나 권태의 중심에 조용히 머물면 알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공허가 아니라,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방이다.

바깥 소음이 멀어질수록 묻혀 있던 감각들이 천천히 떠오른다.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는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이 여정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이 질문들은 번쩍이지 않고,

권태라는 느린 시간 위에서 숨결처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분주함은 우리에게 안정을 준다.

할 일이 많을 때 근본적인 물음에서 잠시 벗어나 살아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반복이 길어지면 움직임은 방향을 잃고,

권태가 찾아온다.

이는 결핍의 신호가 아니라

“기존의 의미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조용한 알림이다.

권태 속에서 시간은 넓은 수면처럼 펼쳐진다.

생각은 목적의 끈에서 풀려 천천히 떠다니고,

쓸모를 증명할 필요 없는 이미지와 이름 없는 감정들이 안개처럼 스쳐 간다.

외부 자극이 사라질수록 인간은 오히려 깊어진다.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워지는 압력이 안쪽에서 밀려온다.

흩어졌던 생각들이 서로를 찾아 모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삶의 중요한 전환은 대개 이런 틈에서 일어난다.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모든 것이 평온한데도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느낄 때.

그 어긋남 속에서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게 된다.

권태는 우리를 멈추게 하는 동시에 비워 낸다.

익숙한 의미가 물러난 자리에 낮은 목소리들이 스며들고,

많은 창조는 바로 이 침묵 속에서 싹튼다.

권태는 삶이 건네는 가장 조용한 초대다.

익숙한 나를 잠시 내려놓고 아직 오지 않은 나를 맞이하라는 신호.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시간 속에서 존재는 다음 방향을 천천히 조율한다.

그러므로 권태는 끝이 아니라 문턱이다.

익숙한 세계가 한 걸음 물러나고,

새로운 세계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경계.

우리는 그곳에 서서 스스로의 방향을 그리기 시작한다.

창조는 결국,

세계가 더 이상 나를 끌지 않을 때

내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세계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에 태어난다.


이 순간 어리섞은 물음을 다시 해본다.

"시곗바늘이 멈추면, 우리는 시간 밖으로 떨어져 죽게 되나"


Henri

월, 수, 금 연재
이전 16화불안이라는 나침반 : 자유의 현기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