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의 숲

독해로서의 삶

by Henri

어릴 때 나는 책을 읽다 자주 길을 잃었다.

한 문장이 나를 현실 밖으로 데려가면 글자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나는 그것을 독서의 부산물이라 여겼다.

그러나 나중에야 그것이 독서의 본질이며, 삶 또한 그렇게 읽힌다는 것을 깨달았다.


텍스트라는 단어는 ‘짜다’에서 왔다.

글은 천이고, 의미의 실들이 씨줄과 날줄로 교차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선택과 우연, 기억과 망각이 얽혀 우리를 그 안에 가둔다.

우리는 그 직물 속에 엮인 한 올의 실이다.


하루를 돌아보면 우리는 이미 끊임없이 읽고 있다.

아침의 막연한 감각부터 스치는 기억까지. 우리는 정보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해석하고 있다.

인간은 해석하는 존재가 아니라, 읽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말했다.

의미는 독자에게 달려 있고, 읽는 순간마다 새로 태어난다.

가다머는 이를 ‘지평의 융합’이라 불렀다.

독해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오래 물었다.

나는 내 삶의 저자인가, 독자인가.

라캉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보다 오래된 언어로 살아간다.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독해가 필요하다.

내가 서 있는 의미의 구조를 한 걸음 바깥에서 바라보는 일.

그 시선에서 자유가 시작된다.


하이데거의 숲길처럼, 길을 잃었을 때 비로소 주변의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삶의 위기가 익숙한 읽기를 무너뜨릴 때 우리는 제대로 읽기 시작한다.

카뮈의 시시포스가 돌을 다시 드는 것처럼, 우리는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타인은 끝내 완전히 읽을 수 없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명령한다고 말했다.

사랑은 완성된 이해가 아니라 끝없는 재독이다.


과거는 고칠 수 없지만, 그 의미를 어떻게 읽을지는 열려 있다.

자유란 더 넓게 읽는 능력이다.


늦은 오후 숲으로 기울어 들어오는 빛.

그 각도에서만 보이는 먼지들.

삶의 의미도 그러하다.

그 빛을 만들어내는 것이 독해다.


숲은 끝이 없다.

우리는 태어나 그 안에 들어서고, 죽을 때까지 걷는다.

좋은 삶이란, 다 읽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오늘의 페이지를 끝까지 읽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걷고, 계속 읽는다.


Hen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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