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 앨리스

by 래연











프롤로그 - 램 카페의 四季

2014.10.19


글쓰기란, 세상에 대한 주체의 자발성의 확인이자 시간에 대한 구애이다.


이 Lamb카페 주변의 사계를 묘사하기 위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여기 테라스에 출근한다던지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2014.10.20. 천변 앨리스


이틀 연달아 하나의 카페에 드나듦은 의미롭다. 녹색의 나뭇잎이 흐린 연두로, 다시 노란색으로 변하여 가는 것처럼, 하루와 하루 사이에도 뚜렷한 간극이 있다. 보일락 말락 하지만 분명한 변화들이 항상 진행 중이다. 인간이 일부러 조작하여 꾸민 세상 또한 자연 못지않은 생명력을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든 미세하게 진화한다. 매일 달라지는 풍경이 1년 주기로 돌면 사계가 빚어진다.











이를테면 어제의 풍경이란 이랬다.

나는 좋아하는 램 카페의 넓은 차양 아래의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가라앉은 날씨였으나 빛이 옅게 깔려서 사색하기엔 그만이었다. 쓰던 소설을 연이어 쓸 수 있었다. 흐름이 좋을 때 그러하듯, 문장들을 누군가가 술술 불러주는 느낌이었다.

천변 위로 올라오면 바로 이어지는 차도와 보도에 면한 이 카페테라스, 이 지형이 얘기해주듯 이곳은 천변 양쪽의 차 소리들이 가차 없이 씽씽, 그 어떠한 사념이라도 낱낱이 밟아줄 기세로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곳에서만 느끼는 기이한 평온 속에 나의 오감은, 자신이 촉수를 펼칠 절대 안락한 공간을 알고 있다는 듯, 거의 구애받지 않고,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딘가에 깊이 박혀 들어 뻗어 나간다.


이렇게 쓰는 동안 밀크티가 식어간다. 시럽을 조금 더 붓고는 한 모금 마신다.

어제, 그렇게 몰두하여 있는 사이에, 오른쪽의 철로 된 옆 테이블에 두 청년이 도착했었다. 여기는 당연히 흡연석이었으나, 그들은 곧바로 내게로 향하게 된 연기 방향을 의식한 것처럼, 차도 맞은편으로 건너가서 피웠다. 의도한 것인지, 그들 나름의 다른 편의에서였는지는 모르나 왠지 배려로운 흡연으로 여겨졌다. 흡연 후 그들은 곧 떠났다.






그들이 비운 자리에 이번에는 한 외국인 아저씨가 왔다. 그리 본 적 없는 초록빛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더니, 실버 테이블 위에 책을 한 권 얹었다. 훔쳐보니 ‘Shadowboss' 란 제목의 책이었다. 그는 잠시 후, 커피 가루로 채운 재떨이 위에, 곰이나 토끼 인형의 찻잔으로나 어울릴 법한 노란 에스프레소 잔을 얹어 놓고는 독서에 빠져들었다. 흘긋 훔쳐보는 기색을 내지 않을 수 있는 위치에서, 그가 잘 보였다. 앉은 자세에서, 멜빵이 걸쳐진 그의 배는 조금 나와 보였다. 그에게서 내게로 길게 늘어져 날아오는 담배 연기가 그다지 싫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그의 깊은 독서의 세계로 출발하며 멀어지는 기차가 뿜어 남긴 길고 아스라한 연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내게 이 천변이 주는 평온은 어디서 기인하는지 모른다. 이 카페는 천변 무대에서 불과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저 천변 무대의 스탠드 혹은 이곳 테라스에 앉아 있노라면 흡사, 하늘 강가에 있는 기분이다. 천(川) 변이 천(天) 변이 되는 것이다. 여기 앉으면, 저 하늘 위, 또 하나의 시름없는 내가 이 낮은 곳의 남루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작고 하얀 돌들을 세고 있는 것만 같다. 기이한 동시성.


지금은 가을이라서 이 천변에는 갈대가 무성하고 그 사이로, 간혹 뛰어가다 넘어지는 아이처럼 햇빛이 쓰러진다. 천변 스탠드 앞쪽엔 무대가 있다. 여기서 무슨 공연이 이뤄지는지는 모르나, 볕 좋은 낮에는 대개 엄마와 아기가 뛰노는 모습이 제일 흔하다. 거듭 보아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이 아기들은 세상이라는 무대에 나가기 전에 자신이 밟았던 이 작은 무대를 기억하게 될까?


언젠가는 일광욕을 즐기는 오후에 여기 무대 스탠드에서, 청바지를 입은 친구 하나가 정장을 차려입은 친구를 녹화하는 모습도 보았다. 프러포즈 영상을 촬영 중이었다. 햇빛 가득한 이곳에선, 희망 부푸는 미래에의 다짐이 거짓 공약처럼은 들리지 않았다.






이곳에 오기 위해 천변 위 도로를 걷던 어떤 날엔 왜가리가 날며 ‘꺼어’하고 소리를 냈다. 우아하게 날아가는 새의 목청에서 어떤 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백조의 울음처럼 비장하기조차 했다.

다른 어떤 날엔 비 온 직후라 물이 조금 불어있는 천변 징검다리를 건너가는데 웬 생물체가 헤엄을 치고 있어 가까이 가봤더니, 징검다리 돌 위로 재빨리 몸을 움직여 사라져 버렸다. 한 마리 쥐였다. 쥐가 헤엄 치는 걸 보다니! 이상한 나라에 들어온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다른 일요일에는 카페 오는 길바닥에 온통, 누군가가 흘렸는지 모를 트럼프 카드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잿빛 타르 위 노란 차도 선 사이에 걸친 퀸과 킹, 스페이드 A. 개울가에 핀 늦가을 장미도 어쩌면 트럼프 병정들이 칠해놓은 건지도 몰랐다.

천변의 매력은 조금씩 차차 이야기하기로 한다.











오늘은 어젯밤 내린 비로 온몸이 눅눅 해진 데다, 기르는 고양이를 잃어버리는 악몽까지 겹쳐서, 머리칼과 온몸이 땀에 젖은 채 깨어났다. 평소보다 한 시간 늦게 일어났고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모든 게 삐걱이고 아귀가 맞지 않아 뒤틀렸다. 그래서 더욱 쫓기듯 이 천변에 왔다.

오늘 풍경은 비교적 단순하다. 여기 바깥 테라스에는 기후 탓에 아무도 앉지 않는다. 나 또한 더 안온한 실내를 택하려다가 그냥 밖에 앉았다. 비어 있는 옆 테이블 밑에는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이 젖은 땅에 붙어 있다.

이 카페테라스 옆에는 빈티지한 초록빛 철문이 있어, 카페 위 빌라로 연결된 입구 역할을 한다. 오늘 이 문으로 여러 사람이 왕래하였다.

이런 날엔 밀크티가 제격이다. 나는 투명한 컵을 잡아 차를 마신 다음, 아메리카노로 리필한다. 새로 온 리필 컵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Make today

the best day

of your life


오늘을 리필하게 된다.



실내엔 그림책 작업을 하는 작가들로 보이는 여자 두 분이 물감으로 가느다란 풀꽃 따위들을 그리고 있다.


지금 내 눈앞 젖은 땅바닥 위에 절로 만들어지는 수많은 그림들, 그것들을 밟아 귀가하련다. 곧 오후가 기울어가며 쌀쌀맞게 나를 전송할 것이다. 오늘은 잊지 말고 이 길 끝 모퉁이의 야채가게에서 연근을 사서, 배추 연근 홍시가 어우러지는 겉절이를 해 먹을 거다. 이만 안녕. Au revoir. A de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