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자라나는 시간
<아몬드>는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감정이 없다는 것은 결핍인가 아니면 또 다른 방식의 존재인가.
이 소설은 차갑게 시작하지만 읽을수록 서서히 온도를 얻는다. 온도는 격렬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이해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손원평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그는 상처를 설명하지 않고 관계 속에서 드러나게 한다. 문장은 간결하고 건조하다. 그러나 그런 건조함은 무감각이 아니라 배려다.
감정을 모르는 소년 윤재의 시선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독자가 먼저 판단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둔다. 이런 거리가 이 작품의 윤리다.
윤재는 선천적으로 공포와 분노를 잘 느끼지 못한다. 뇌의 편도체, 곧 아몬드의 기능 이상 때문이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감정 표현을 배우지 못한 채 자란다. 그러나 소설은 감정 결핍을 병리로만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묻는다. 과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인가. 분노를 잘 표출하는 사람이 더 건강한가, 슬픔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 더 인간적인가.
이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은 윤재만이 아니다. 상처를 분노로 표현하는 곤이, 불안 속에서 아이를 키운 어머니, 무심한 듯 다가오는 주변 인물들. 이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감정을 다룬다. 누군가는 과잉으로, 누군가는 결핍으로, 누군가는 침묵으로 감정을 다룬다.
<아몬드>는 이런 다양한 감정의 형태를 나란히 놓는다. 그 속에서 독자는 깨닫는다. 감정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임을 깨닫는다.
이 소설의 미덕은 치유를 극적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윤재는 갑자기 완전한 감정의 인간으로 변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미세한 변화가 누적된다. 타인의 눈빛을 오래 바라보는 일, 말 대신 기다리는 시간, 손을 내미는 순간이다.
감정은 번개처럼 오지 않는다. 씨앗처럼 자란다. 그래서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면서도 동시에 관계의 소설이다.
이 작품을 하나의 키워드로 압축한다면 공감의 학습이다. 공감은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 배워가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감정이 풍부한 사람을 더 인간답다고 믿지만 <아몬드>는 조용히 반문한다.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과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같은 일인가. 이해는 감정의 양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일상으로의 교훈은 단순하다. 누군가의 표현이 서툴다고 해서 마음까지 없다고 단정하지 않은 것. 분노가 큰 사람을 무조건 위험하다고 규정하지 않는 것. 감정의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배우고 있다.
<아몬드>는 부드러운 소설이다. 그러나 부드러움은 나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기다림의 힘이다. 감정은 강요로 생기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허락될 때, 관계가 지탱될 때 조금씩 자라난다.
이 소설을 덮고 나면 독자는 묻게 된다. 나는 타인의 감정을 얼마나 이해하려 했는가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얼마나 인내하며 키워왔는가. 문학은 그렇게,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인간을 다시 배우게 한다.
Hen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