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마음의 크기는 어디에서 결정되는가

by Henry




조너선 스위프트는 웃음을 무기로 삼은 작가였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위안이 아니라 진단에 가깝다.
정치와 종교, 과학과 문명이 자랑하던 18세기의 낙관을 향해
그는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정말 이성적인가.
권력과 지식은 인간을 더 고귀하게 만드는가.

스위프트의 문장은 간결하지만 잔인하다.
그는 인간을 축소하거나 확대해 보여줌으로써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임을 드러낸다.
<걸리버 여행기>는 모험담의 외피를 썼지만
실은 인간의 마음을 계측하는 냉정한 자다.

걸리버는 여러 나라를 여행한다.
난쟁이들의 나라 릴리퍼트에서는 거인이 되고
거인들의 나라 브롭딩낵에서는 난쟁이가 된다.

하늘을 떠도는 라퓨타에서는 지식이 삶을 지배하고
말들이 이성의 표본이 된 후이늠의 나라에서는
인간이 야만으로 분류된다.

몸의 크기는 매번 바뀌지만
인간의 습관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권력 앞에서는 오만해지고
힘이 없을 때는 비굴해지며
자신의 위치를 도덕의 기준으로 삼는다.

스위프트는 이런 반복을 통해
마음의 크기가 물리적 크기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차분하게 증명한다.

<걸리버 여행기>의 탁월함은
인간을 직접 고발하지 않는 데 있다.
대신 시점을 바꾼다.

우리를 크게 만들거나
아주 작게 만든다.
결과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라
사소한 집착과 자기 중심성이다.

이 작품은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권력 앞에서 쉽게 팽창하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는 쉽게 수축한다.

마음의 크기는
지식이나 지위가 아니라
타인을 향한 인식의 폭에서 결정된다.

스위프트가 요구하는 덕목은 겸허다.
겸허는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지성이다.

릴리퍼트의 소인들은 작지만 교만하고
브롭딩낵의 거인들은 크지만 도덕적으로 단순하다.
크기는 조건일 뿐
마음을 키우는 요인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아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지혜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겸허는 지식의 포기가 아니라
지식의 한계를 인식하는 태도다.

연구에 따르면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타인의 감정에 둔감해지기 쉽다.
스위프트의 소인국은
그런 역설을 풍자의 언어로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과도한 자기 확대와 자기 축소를 모두 경계한다.
겸허는 자신을 과장하지도
스스로를 지우지도 않는 균형의 덕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사람의 마음이 커지는 순간은
자신의 크기를 자랑할 때가 아니라
타인의 세계를 자신의 기준에서 내려놓을 때임을
가장 날카로운 웃음으로 보여주는 풍자다.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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