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구청 대강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의 막바지, 앞줄 수강생이 주섬주섬 가방을 쌌다. 그래서 물었다 "그리 급히 어디 가시려는지?" 혹시, "우리가 가는 곳이 저곳(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면, 쉬엄쉬엄 가도 되지 않을까요?" 강당 모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따뜻한 여유가 교실을 채웠다.
세월의 강물에 발을 담그고 정신없이 헤엄치다 보니, 문득 멈춰 서서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거울에 비친 낯선 중년의 얼굴을 보며, 마치 누군가 정해놓은 경주로를 전력 질주해 온 기분이 든다. '여행처럼' 산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열심히 먹고살며 자식 농사 지었더니 중년이 훌쩍 넘어 있었다.
나는 '다들 그런 것처럼' 살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톱니바퀴처럼 굴러왔다. 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참고 이겨내면 좋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채찍이 되어 나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문득, 숨이 턱 막히는 순간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어릴 적 놀던 '의자 빼기 게임'이 떠오른다. 끝까지 살아남은 한 명, 최종 승자가 얻는 것이 어쩌면 '고독'이 아닐까 하는 서늘한 생각이 든다. 모두가 죽음이라는 같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면, 왜 우리는 그토록 급하게 서둘러 왔을까? 바보처럼, 누군가 만들어 놓은 틀을 따라 헐레벌떡 뛰어온 시간들이 허탈하게 느껴진다.
네모진 교실에서 지식을 배우고, 네모진 아파트를 필사적으로 갈망하며 살았는데, 결국 마지막 도착지가 네모진 납골당을 향한 질주였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 허무하다. 인생의 아이러니 앞에 쓴웃음을 짓게 된다.
이제라도 속도를 줄여야겠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멈춰 서서 내면을 깊이 살피고, 비로소 나 자신을 사랑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세상이 강요하는 네모난 길이 아닌, 나만의 세모진 둥근 길을 쉬엄쉬엄 찾아 걸어야 한다. 그렇게, 남은 시간을 여행처럼 즐기면서 말이다.
결국 모두가 가는 곳이 정해져 있다면, 남은 여정만큼은 신나게 즐기다 가야 하지 않을까? 미치도록 사랑하며 살다 가야 하지 않을까?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무엇에 정신이 팔려 우선순위를 잊고 살았는지 곱씹어 본다. 이제 슬로, 슬로, 슬로. 깊은 숨을 한 번 쉬고, 다시 걸음을 내딛을 때다.
아무리 좋은 낙원이라도,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이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까지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활짝 열고 천천히 가야지. 굳이 생각을 억지로 정리하려 들지 않고,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보고, 느끼고, 누리며 가기에도 이 삶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짧은 순간이니까.
가는 곳이 모두가 말하는 그곳이라면, 뛰지 말고 쉬엄쉬엄 가자. 이 다짐을 품고, 남은 삶의 페이지를 천천히 채워나가기로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