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진 감각에 채워지는 지혜

by 허훈

어느 날 오후, 평소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다 무심코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코끝에 걸려 있던 돋보기를 채 벗지 못한 채였다. 거울 속에 비친 낯선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나는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돋보기 너머로 본 내 얼굴에는 평소 보지 못한 깊게 파인 주름이 그려져 있었고, 피부는 예전의 탄력을 잃은 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주름이 많이 생겼지.


깜짝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거울 속의 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토록 시각적인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더 서글픈 것은 하나둘 고장 나는 신체의 감각들이다. 최근 들어 눈은 침침해져 돋보기 없이는 글을 읽기도 자판을 두들기기도 힘들고, 귀는 예전과 달리 되묻기를 반복한다.


어두워진 눈과 희미해진 귀.

순간, 이런 나를 접하며 슬픔이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거울 속의 나에게 속삭였다. 나이가 들었다고 너무 아파하지 말자고.

나이 들어 귀가 어두워지고 눈이 희미해진 것이 슬픈 일뿐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히려 이는 하늘이 내게 준 '감사한 필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며 귀가 조금씩 어두워지니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이 예전만큼 나를 덜 괴롭히지 않지 않은가. 남들이 무심코 던진 날카로운 말들, 나를 깎아내리는 험담, 굳이 듣지 않아도 될 세상의 비난들이 이제는 내 귓가에 닿기 전에 희미해지지 않은가. 들을 것을 덜 듣게 되니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가. 예전 같으면 사소한 말 한마디에 밤잠을 설쳤을 텐데, 이제는 그 소리들이 먼 산의 메아리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 사라졌다.


눈이 희미해지니 세상의 허물도 덜 보게 된다. 돋보기를 써야만 겨우 보이는 주름처럼, 세상의 추한 구석들도 이제는 뽀얀 안개가 낀 것처럼 부드럽게 보인다. 남의 잘못을 꼬치꼬치 따져 묻던 예리함 대신, 적당히 가려진 시야 덕분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넉넉한 마음이 생긴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하며 눈을 부라리던 욕심도 시력이 약해진 만큼 내려놓게 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살아왔다. 마음은 수많은 비교와 경쟁의 목소리에 상처를 입었다. 이제 세월은 내게 ′이제 덜 보고, 덜 듣고, 네 안의 목소리에 집중하라′라며 감각의 창을 적당히 닫아주고 있는 것이지 싶다.


거울 속의 페인 주름진 얼굴은 내가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증거다. 돋보기는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배우고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의지의 증표이다. 눈과 귀가 어두워진 만큼 내 안의 영혼은 더 맑고 깊은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나이가 들며 얻게 되는 삶의 평형감각이다.


그러니 나이가 들었다고,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아파하지 말자. 쇠약해지는 육체는 비록 상실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비워진 틈 사이로 비로소 진정한 평화와 감사가 채워지기 시작한다.


오늘도 나는 희미한 눈으로 세상을 축복하고, 어두워진 귀로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세월이 선물한 이 '필터' 덕분에 나는 오늘 더 행복할 수 있었다.


잘 견뎌준 나에게, 그리고 주름진 나의 인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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