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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군 Sep 05. 2017

오르페우스는 흥을 깨지 않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디오니소스님




재치넘치는 감정의 표현


슬픔은 사람을 지탱하는 가장 큰 감정이다. 2년 전 인기를 끈 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도 항상 밝기만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것은 얼마나 큰 반작용을 불러오는지 보여준다. 영화는 긍정적인 마음만 가지는 것이 용기 내어 이겨내야 하는 상황도 계속해서 악화시키는 자세라고 표현한다. 때론 마음껏 엉엉 울고 슬퍼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슬퍼하며 기뻐하고 짜증내며 화합하는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사용된 가면


수 천년 전 그리스에는 이런 슬픔을 일찍이 사랑하며 음미한 사람들이 있었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상상한다. 그것을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 창의력을 얹어 현실의 예술로 만들었다. 연극이 그중 하나다. 신이 됐건 신화 속의 괴물이 됐건 끊임없이 주인공을 괴롭히는 문제들이 나타나고, 주인공은 이 것들을 하나하나 이겨내며 마침내 생의 절정으로 달려간다. 노력으로 많은 것을 이루어 낸 주인공은 존경받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아름다운 여인과 왕국을 통치한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한 번쯤은 꿈꾸는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느 극적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결국 자멸한다. 신이 내린 절대적 신탁과 같은 금기를 어긴 주인공은 결국 가장 높은 절정의 벼랑 끝에서 스스로를 가장 낮은 곳의 나락으로 내려친다. 이것을 바라보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을 것이다. 한 사람의 생애가 이렇게도 비극적일 수 있다는 것인가. 인간의 생애는 영영 신들의 지배 아래에 비참할 것인가. 라며 최고조의 순간에 느끼는 비극적 공감으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눈과 마음에 고인 슬픔의 눈물로 내면을 씻어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카타르시스'라 부르며 감정의 정화로 일컫었다. 그렇게 상상력으로 표출된 인간의 예술은 고대 그리스인들을 울고 웃기며 위로했다.


사랑하기에 이토록 절박한 두 남녀. 부여잡은 두 손의 간절함.


슬픔을 동경한 그리스인들의 마음에 아직도 잊히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 바다를 가르고 하늘을 날며 인간들을 위압적으로 지배하는 일반적인 신화 속 인물들과는 다른 부드러운 힘을 가진 남자. 오르페우스다. 그는 아버지 아폴론으로부터 리라(그리스의 현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배웠고 그가 하는 연주는 뛰어나다 못해 기상을 바꾸고 생물학적인 현상을 뒤엎는 힘을 지녔다. 연주를 하면 생기 없는 목석이 춤을 추고 난폭하고 저돌적인 금수들도 얌전해졌다. 자신의 전우들이 탄 배를 함께 항해하며 거친 파도를 헤쳐나갈 때, 리라 연주로 파도를 잠재우기도 했던 오르페우스다. 


예나 지금이나 같다. 악기를 연주하는 남자는 인기가 많다는 것. 오르페우스는 자신을 사랑하는 요정들에게 끝없는 러브콜을 받았다. 그중에서 에우리디케라는 한 요정과 연인이 된다. 사랑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숲 속을 거닐었다. 누가 봐도 선남선녀인 두 사람의 앞 날에 그리스 신들의 축복만이 가득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사고가 터지고 만다. 에우리디케를 귀찮게 하며 추근대는 양치기가 있었다. 그를 피해 도망가는 에우리디케는 실수로 독사에 물려 죽어버리고 만다. 오르페우스는 그렇게 허망하게 잃은 그녀를 마냥 보내줄 수만은 없었다. 애도하는 밤낮으로 노래를 연주하고 매일 같이 눈물로 하루를 보내던 그는 결국 저승세계의 하데스를 찾아가 그녀를 다시 한번 살려보기로 결심한다. 


그렇지만 저승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머리가 세 개나 달린 괴물견 케르베로스도 따돌려야하고 저승을 지키는 까다로운 수문장 카론의 조각배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지만이 하데스의 앞에 도달할 수 있다. 오르페우스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통곡의 리라 연주를 통해 통과해낸다. 이윽고 저승의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르페우스의 슬픈 사연과 심금을 울리는 연주를 듣게 된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는 전례가 없던 죽은 자를 살려 보내는 것에 허락한다. 


단,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아마 데드플레그쯤 될 것이다. '지상으로 나갈 때까지 오르페우스는 뒤돌아봐선 안된다'는 조건. 인고의 시간을 거쳐 오르페우스는 아내의 차갑디 차가운 손을 잡고 결국 다시 지상의 빛을 보는 순간에 당도했다. 한 발자국만 더 걸어가면 사랑하는 그녀와 다시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다. 다시는 독사에 물려버리는 그런 터무니없는 사고가 그녀에게 일어나게끔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영원토록 아름다운 연주를 하며 그녀를 지켜낼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오르페우스는 지상에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그토록 바라던 그녀를 뒤돌아봤다. 


아아, 사랑하는 에우리디케여! 


바로 그 찰나, 미처 저승세계를 빠져나오지 못한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와 원치않았던 마지막 눈인사를 나누자마자 다시 하데스가 존재하는 나락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그제야 오르페우스는 깨닫는다. 지상으로 '두 사람 모두'가 나와야 했었다는 것을. 그녀는 아직 이승으로 돌아오기 전이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모호하게 조건을 말한 하데스를 탓할 것인가. 길고 길었던 저승을 탓할 것인가. 스스로 곱씹어 냉철하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스스로를 탓할 뿐이다.


브라질판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고대에 멈춰 있지 않았다.  1959년 프랑스 감독 마르쉘 카뮈의 작품 <흑인 오르페 : Orfeu Negro>(오르페우스의 프랑스식 표기인 '오르페')로 부활했다. 신들도 울려버리는 오르페우스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카뮈 감독은 춤과 노래로 뒤엉킨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삼바 축제의 한 복판으로 데려온다. 보다 남미스러운 축제 분위기 속에서 감독은 보사노바적 서정성을 꺼내 든다. 


감미로운 선율과 잔잔한 흐름은 마치 리라 연주를 하는 오르페우스를 떠올리게 한다. 대지를 춤추게 하고 저승에서 이승을 뒤흔든 연주를 했던 오르페우스처럼 빵 한 조각 먹기 힘든 불행이 만연한 아이들과 속절없이 싸우는 거리의 행인들을 춤추고 웃게 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리라 대신 기타. 올림푸스 산 대신 브라질의 빈민촌을 배경으로 하며. 그리고 그는 평화로운 가난 속에서 한 여인 '에우리디케'를 만나게 된다. 남미판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과연 행복해졌을까. 아니면, 그리스의 조상들의 뒤를 따랐을까. 오르페우스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에우리디케를 그리워하며 끝없이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늦었다고 그만 뭐라하면 안될까요..


올림푸스 신들과 그리스 반도에 살았던 인간들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유전 같다. 그 속에서 나오는 원유와 부산물들은 아직도 유럽 전체를 아우르며 사상적으로 지배하고 물리적으로 문화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오르페우스의 이야기가 우리나라에 가장 잘 알려진 예시는 바로 TV 방영 애니메이션 <올림푸스 가디언>이다. 그 장면을 보며 개인적으로 입맛이 썼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보며 비극적 슬픔으로 삶을 뒤돌아보고 사랑을 키워나갔을 그리스인들과 달리, 편집하고 합성하여 우스꽝스러운 지각의 고유명사(?)로만 알려진 우리의 한정적 시각이 조금 안타까웠다.


축제의 신인 디오니소스는 단연 오르페우스와 친했다. 그리고 그를 존중해줬을 것이다. 축제와 연회의 장에 음악이 빠진다니 영 섭섭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그를 지각의 고유명사로 만들어 버린 것은 바로 그 디오니소스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디오니소스님.



이 유명한 한마디와 함께 흥을 깨버렸다며 디오니소스가 오르페우스를 질책하는 장면은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오르페우스의 슬픈 사연을 눌러버린 채 가장 유명한 흑역사로 자리 잡아 있기 때문이다.


에우리디케를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그 절절한 이야기로 우리를 지금까지도 울리고 웃기는 소중한 오르페우스. 그리고 그리스의 비극. 단순히 흥을 깼다며 나무라는 건 조금 심한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오르페우스는 우리의 흥을 아직까지도 깨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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