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사회
90년대 생이라면 만화 <데스노트> 열풍을 기억할거다. 데스노트는 이름이 적힌 자를 죽이는 사신의 노트다. 천재 고등학생 야가미라이토가 이걸 우연히 얻게 되고, 정의를 신을 참칭하며 대량 살인을 시작한다. 환상의 도구라고 해도 결국 범죄는 흔적을 남기는 법. 명탐정 L은 그의 정체를 추리하며 수사망을 좁혀나간다. 라이토와 L, 과연 그들의 운명은? <데스노트>는 소년만화 답지 않은 복잡한 플롯과 서스펜스로 인기를 끌었고, 2006년부터 영화화되어 지금까지 네 편의 장편 영화가 나왔다. 다만 영화에 대한 평은 좋지 않다. <데스노트> 실사 영화 역시 캐스팅의 충격과 만듦새의 부족함은 어쩔 수 없었다. 수많은 만화 원작 영화들 처럼.
데스노트는 물론 판타지다. 그러나 이름이 적히면 죽는 노트는 현실에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지금 랭리의 CIA 본부에 놓여있는 노트(혹은 하드디스크)가 있겠다. 여기에 이름이 적히면 반드시 죽는다. 어디로 도망치고 어디로 숨든지 말이다. 무력한 개인은 물론이고 군대를 거느린 장군들도 죽는다. 오사마 빈라덴은 꽤나 버텼지만 결국 비밀저택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사담 후세인은 토끼굴에 숨었지만 끌려 나와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 전에 두 아들은 은신처와 함께 폭사했다. 콜롬비아의 마약왕, 알카에다와 ISIS의 지도자들, 미국의 정적들 그리고 우리는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이 정보부의 살생부에 이름을 올렸고, 얼마안가 싸악 뒤져버렸다.
이게 무슨 데스노트냐고? 데스노트와 정보기관의 살생부는 본질적으로 기능이 같다. 그래도 비유가 와 닿지 않는다면 한번 상상해보자. CIA가 당신을 위험인물로 정했다. 당신의 이름, 얼굴과 주소가 즉시 파악된다. 그들은 항공정찰, 도청과 현지 정보원을 통해 정보를 모은다. 생활과 이동 패턴이 파악되고 당신을 제거할 수단을 고른다. 드론의 미사일로 날려버릴까 했지만 민간인 피해를 감수할 수는 없다. 대신 어두운 밤, 검은 헬리콥터 한 대가 당신의 아파트 옥상에 JSOC 대원들을 내려놓는다. 이 프로들은 당신 아파트의 설계도면을 미리 입수해서 따라 만든 킬하우스에서 맹훈련을 마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당신의 현관문이 열린다. 끝이다.
물론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폭탄테러라도 계획하지 않는 이상 당신을 죽일 명분은 없다. 중요한 것은 명분이 없을 뿐, 완벽한 수단이 있다는 거다. 오늘날 정보통신 기술이 국가의 정보기관에게 쥐어준 능력이다. 미국 대통령은 마음만 먹으면 지구상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 사신에 필적하는 힘이다. 데스노트로 사람을 죽이는 데는 이름(name)만 있으면 된다. 국가의 정보기관 역시 명분(name)만 있으면 된다.
명분쯤이야 쉽게 만들 수 있다. 국가의 법질서와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을 때, 정보기관은 그들의 노트에 명분을 마음껏 써 내려간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의 중정과 안기부가 그랬다. 양지에서는 법의 이름으로, 음지에서는 안보라는 이름으로 죄 없는 사람을 수없이 죽였다. 이게 민주주의와 정의가 멈추면 안 되는 이유다. 그리고 그 작동의 연료는 시민의 감시와 참여다.
며칠 전 영화 <스노든>이 개봉했다. 실존인물 에드워드 스노든은 전직 CIA 요원으로, 미 국가안보국(NSA)의 대규모 불법 감청 사실을 폭로했다. 스노든은 현재 러시아에 망명 중이다. 스노든 이전에는 미군의 브래들리 매닝이 있었다. 그는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하는 헬리콥터의 건캠(gun cam) 영상을 포함한 군의 어두운 비밀을 위키리크스에 전달했고, 대가로 35년 형을 선고 받았다. 이들의 폭로는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스노든과 매닝 같은 고발자 덕분에 정보기관이 추악한 짓을 마음껏 못 한다는 거다. 또 이런 고발자를 지지하고 보호해주는 시민들이 있어 이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소식 하나, 갓바마 형님께서 지난 달 매닝을 대폭 감형 해 주었다.(사실 집어넣은 것도 오바마지만) 이게 미국이 위대한 이유다. 그리고 나쁜 소식 하나, 똥럼프는 매닝의 감형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리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든단다.
데스노트는 존재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이 사신의 힘을 조각조각 나누어 우리의 손에 쥐어준다. 부디 우리가 이 힘을 빼앗기지 않기를. 그리고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