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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늘의 끝 Nov 12. 2022

잊을 수 없는 첫 내추럴 오렌지, 도멘 리가스 요마타리

Domaine Ligas, Yomatari 2018




나는 와인을 마실 때만큼은 꽤 모험가인 편이다. 물론 좋아하는 맛을 찾아 와인을 고르는 일도 많지만, 재미있고 독특한 맛을 경험하고 싶다는 점이 내가 와인 중에서도 내추럴와인을 찾아 마시는 이유다. 내추럴와인을 접하기 전에도 컨벤셔널 와인을 여러 종류 사서 맛을 비교하거나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골라 마시는 것에 즐거움을 가졌다. 품종이 다르거나 지역이 다르면 물론 맛과 향의 차이가 있지만 후각과 미각이 크게 훈련되지 않은 나로서는(게다가 그런 감각들이 꽤 둔감함 편) 몇 모금 마신 뒤 매끄럽고 촘촘하게 짜여 있는 여러 향과 맛의 스펙트럼을 읽어내는 것이 어려웠다. 어울리지 않는 페어링 정도는 거를 수 있었지만 와인을 마시면 마실수록 만족스럽게 와인을 마셨다고 할만한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서 비슷비슷한 맛과 향을 가진 와인은 내게 큰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러다 내추럴와인에 대해 들었는데 일단 악평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오줌 냄새가 난다, 마구간 냄새가 난다, 썩은 달걀 냄새가 난다, 메주 같은 쿰쿰하고 꼬릿한 냄새가 난다, 너무 톡 쏘는 맛이 식초 같다, 매니큐어나 리무버 냄새가 난다, 주유소 냄새가 난다, 고무 탄 내가 난다, 곰팡이 냄새가 난다 등이다. 누군가는 이 향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인상을 찌푸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향이라면 맛이라면 어쩐지 나에게 색다른 경험과 환기가 되어 줄 것 같았다. 게다가 이런 향을 풍기면서도 맛있다는데, 그런 건 도대체 어떤 걸까 궁금해졌다. 나는 시골 할머니네 뒷방 쿰쿰한 곰팡내를 종종 그리워하고, 어린 시절 아빠 차를 타고 동네 한적한 길을 달릴 때 맡던 거름 냄새에 추억이 있고, 과일은 단맛보다 신맛으로 먹는 편인데다, 매니큐어를 바를 때 화하게 피어오르는 그 화학적인 냄새가 썩 불쾌하지 않은 사람이다. 게다가 메주 띄우는 냄새가 나는 집에서 온 종일 지내도 꽤 살만했고, 그 메주를 가지고 만든 청국장은 너무도 맛있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기에 은근히 내추럴와인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피어 올랐다. 맛있게 빚어진 한 잔의 술에서 느껴진다는 그 생경한 향들이 점점 맡고 싶어졌다.




2020년 5월, 성수동에서 내추럴와인을 처음 마셨다. 이 날은 내추럴와인 첫 경험일이자, 무려 4종의 내추럴와인을 마신 날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녁에 내추럴 와인바로 운영하는 레스토랑들은 점심에 내추럴와인을 잔으로 제공하기도 한다. 우리가 간 음식점 역시 그런 곳이었고, 몇 가지 메뉴와 함께 내추럴와인 화이트와 레드 2종류를 잔으로 주문했다. 이태리의 화이트, 슬로바키아의 레드였다. 화이트는 농축미가 있으면서 클래식하고 균형 잡힌 매력이 있는 와인이었는데 기대했던 독특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 볼륨감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소탈하며 쿰쿰한 향이 나는, 컨츄리한 느낌의 레드는 우리에게 무척 신선했다. 어느 유럽 영화에서 나오는 넓게 펼쳐진 논밭과 지평선, 돌담으로 지어진 작은 집들이 띄엄띄엄 있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 떠올랐다. 독특한 인상에 맛도 좋아 한 잔을 더 요청했다. 이 전 잔이 보틀의 마지막 잔이었기 때문에 같은 와인을 새로 오픈해 따라주셨다. 잔잔한 제비꽃 향과 풍성한 검은 과실미가 첫 잔보다 도드라졌다. 자글거리는 피지함에서 느껴지는 신선함과 경쾌함이 이전 잔과는 다른 매력을 느끼게 했다. 각자 매력적이었던 바틀의 처음과 끝의 인상뿐 아니라, 그 놀라운 차이가 아직까지 내게 선명히 남아있다. 게다가 이 때 얻은 감각은 이전날 컨벤셔널 와인을 마실 때 느꼈던 지점들과는 무척 다르고 독특해서 좀 더 마셔보고 싶다는 욕구를 강하게 느꼈다. 분명한 건 단지 신선함과 색다름만 있고 맛이 없었다면 그런 욕구로 이어지지는 못했을 거란 점이다.




해가 지고 우린 한적하고 어두컴컴한 골목에 위치한 한 와인바로 들어섰다. 방금 전 내추럴 와인에 입문함과 동시에 반은 반해버린 우리는 와인을 바틀로 주문했다. 한 병에서 나온 첫 잔부터 마지막 잔까지 점차 변해가는 캐릭터들을 온전히 경험해 보고 싶었다. 주말 저녁이었고 리스트에 있는 맛있고 가성비 좋은 와인들은 거의 다 빠진 상태였다. 주인으로부터 게 중 인기가 좋고 내추럴 와인 중에서도 맛있다는 레드를 한 병 추천 받았다. 거금을 들여 오픈한 바틀인데 첫 잔부터 우리 둘은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맛은 있어서 괜찮은데 라며 금세 한 병을 다 마신 덕분에 다른 보틀을 더 골라 보기로 했다. 나, 내추럴와인이야! 하는 걸로 주세요. 그런 건 대개 호불호가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주인의 질문에 우린 반색했다. 바로 그런 거라고, 그게 저희가 찾던 거라고. 그렇게 나의 첫 오렌지와인, 도멘 리가스의 요마타리를 만났다. 깜깜한 밤 정어리 무리가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는, 라벨의 그림부터 독특한 와인이었다.


눈 앞에서 와인이 오픈 되자마자 요상한 향이 풍겼고, 잔에 담긴 와인의 향은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글쎄 그 때 약간 마시기를 주저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동생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린 드디어 만난 것 같다고, 그 이상하고 마시기 껄끄럽다는 내추럴 중에서도 진짜 내추럴와인을 만난 것 같다고 박수를 쳤다. 영롱하게 빛나는 주황빛 색과는 다르게 맛은 쓰고 떫었으며, 이상하리만치 미끄러지는 듯한 질감과 무엇보다 너무 쿰쿰하고 과하게 말하면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난다고 느꼈다. 마시는 일이 부담스러워 얼굴은 일그러지면서도 그 순간이 설레고 들뜨고 반가웠다. 동생과 계속 이게 뭐냐고, 이게 무슨 맛이냐고, 뭐 이런 맛이 있냐고 악평을 하면서도 너무 재미있어서 얼굴은 계속 웃고 있었다. 익숙한 향과 맛이 아니라는 것은 그 와인을 불편하게 느끼게 했지만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더 파고들게 했다. 우린 와인바가 문을 닫을 시간까지도 이 와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할 이야기가 넘쳤다. 놀랍고 어색하고 맛은 없었지만 계속 와인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당연히 맛은 없어서 반이나 남겨 들고 왔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막아뒀던 와인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오, 신기하게도 어제와 달랐다. 그리고 잔에 따라 마셔보니 쿰쿰함도 조금 가시고 매끄러운 질감과 화한 향들이 조화롭게 느껴졌다. 중간에 이 와인을 한 모금 마셔본 남편은 와, 무슨 와인이 오줌 맛이야! 하며 놀랐다. 그 말에 동조했던 나는 3일차엔 이 와인이 조금 더 맛있어 졌다고 느꼈다. 그 땐 오줌 맛, 음식물 쓰레기 맛 그런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내추럴와인의 세계로 들어서게 됐다. 그리고 일 년 뒤에 나의 첫 오렌지, 이 요마타리를 다시 마시며 처음부터 끝까지 변주되는 와인의 풍성한 스토리를 1년 전과는 다른 태도로 읽고 느낄 수 있었다. 와인을 즐기는 템포가 느려진 만큼 놀랍고 신기한 와인의 변화는 즐겁고 유쾌하게 다가왔다.




요마타리는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요물이란 수식어를 가진 내추럴 와인계에서도 독보적인 캐릭터다. 도멘 리가스는 고대부터 내려온 그리스의 전통 양조방식이자 현재까지도 대중적인 렛찌나 스타일로 요마타리를 만들었다. 우리나라 김치를 익히듯 와인을 토기 항아리에 담고 땅에 묻어 숙성하는데 그때 뚜껑을 송진으로 밀폐시키는 방법이다. 이는 와인의 과도한 산화를 막아주며 숙성 과정 중에 송진 향이 배어 와인에서 은은한 소나무 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 와인을 두 번째 마실 때 테이스팅 코멘트를 다시 썼다.

도멘 리가스 요마타리, 민트를 비롯한 시원한 허브향, 솔 향이 지배적이며 여기에 은은한 과실미와 산미가 더해짐. 구조감이 단단하고 독특하면서도 우아한 와인.



내추럴와인을 마셔온 시간은 내게 기다림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시간을 두고 기다릴수록 와인은 자신을 더 풍성하고 자유롭게 보여주었다. 그러려면 낯설고 불편한 향미에 매몰되어 선입견을 세우고 와인을 바라보지 않아야 했다. 천천히 그 순간의 모습에 집중하면 어느새 과하고 불쾌하게 여겨졌던 부분들이 가라 않고, 오히려 다른 풍미와 균형을 이뤄 와인의 특색이자 매력의 일부가 되어 있는 순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첫 모금부터 맛있다고 탄성을 지른 와인도 조금 지나면 또 다른 캐릭터나 밸런스로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가끔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쉽게 균형이 꺾여 향은 죽고 맛도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잘 만들어진 와인은 기다림 앞에서 늘 각자의 모습으로 아름다웠다. 그건 늘 맛있다는 말과는 다르다. 내 취향에 따라 맛이 있기도 없기도 했지만, 첫 인상에 갇혀 와인을 바라 보지 않는다면 어떤 와인이든 그 진면모를 볼 수 있다는 믿음이 지난 시간 동안 내게 생겼다. 그래서인지 내추럴와인을 마실 때면 나는 더욱이 탐험심에 불탄다. 새로운 맛과 향을 느껴보고 싶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다, 그런 모험가의 마음으로 오늘도 와인을 마신다.




*

당시 글라스로 마셨던 와인은, 화이트는 까데노치의 노떼디루나, 레드는 스트레코브의 포르투갈이다. 바틀로 마신 레드는 라소르가의 브루탈데스로, 이 글을 쓰는 이제야 알고 놀랐다. 내가 내추럴와인 입문 날에 라소르가의 와인을 마셨을 줄이야. 라소르가는 전 세계적으로 두터운 팬 층을 보유한 내추럴와인계의 거장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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