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위너의 언캐니 밸리를 읽고
애나 위너는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계에서 일합니다. 그러나 월 1,700달러가량의 형편없는 보수와 출판계의 어두운 미래로 인해 관심도 없던 테크 업계로 눈을 돌리게 되죠. 애나는 한 전자책 스타트업의 계약직을 시작으로 테크 업계의 비개발 업무에 발을 들입니다.
살기 위해 실리콘 밸리에 가다
애나는 전자책 스타트업 CEO가 주선해준 데이터 분석 스타트업의 면접을 보고, 뜻밖에 합격 결과를 얻습니다. 스타트업은 의료보험 혜택과 6만 5000달러 연봉을 제안합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받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애나는 회사가 제안한 조건을 감사히 받아들입니다.
애나는 고객 지원 업무를 담당합니다. 고객 상담을 하기 위해 문제가 있는 고객사의 코드를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는 맡은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야근 수당도 받지 않고 매일 늦은 저녁까지 일합니다.
처음 데이터 분석 스타트업의 비즈니스 모델과 빅데이터에 대해 배울 때, 저자는 빅 데이터에 큰 매력을 느낍니다. 뛰어난 기술력과 디자인으로 고객사와 투자자의 마음을 얻은 데이터 분석 스타트업은 빠르게 성장합니다.
변화에 굼뜬 대기업들의 상품은 기술적으로 정교하지 못했고 인터페이스 수준은 1990년대에 머물렀다. ... 디자인이 훌륭한 인터페이스는 사람들의 불신을 말끔히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마법 또는 종교와 같았다. p. 62
능력주의의 현주소, 실리콘 밸리
실리콘 밸리는 "능력주의"의 신화를 가장 열심히 따르는 곳입니다. 뛰어난 사람, 시장에서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이 좋은 위치를 차지하며,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효율성이 최선인 곳에서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몰랐던 사실이지만, 테크 업계는 숨 막히는 경쟁을 지향하고 모든 것을 데이터로 평가하는 그 쇼핑몰 (아마존)의 기업 문화를 숭배했다. p.16
그러나 능력주의가 가져다주는 경쟁과 피로감, 그리고 패배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경쟁에서 항상 승리할 수만은 없으니까요.
능력주의, 사회 풍자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그 풍자의 대상인 업계가 누구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인 단어였다. .... 그들에게 능력주의는 듣기 좋고 죄책감을 덜어주는 말이었다. 반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이었다. p. 263
일 중독자가 되다
저자는 일 중독자가 될 정도로 맡은 바 업무를 열심히 수행합니다. 그러나 CEO에게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높은 업무 강도에 피로감을 느낍니다. 그는 비교적 연봉이 낮지만, 업무 강도 또한 낮다고 소문난 깃허브로 약 2년 만에 이직합니다.
회사가 곧 나고, 내가 회사를 지켜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내가 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업무에 일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게 합니다.
나는 CEO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정확히는 그에 대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강하게 느꼈다. p.159
어느새 일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회사였고, 회사가 곧 우리였다. 사소한 실수와 대단한 성과는 우리 자신의 무능함 또는 유능함의 증거가 되었다. 일은 하면 할수록 중독되었다. p. 98
그러나 애나는 곧 깨닫습니다. 회사는 회사일뿐이며, 과도한 업무는 CEO와 투자자의 배만 불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일에 나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과몰입이라는 현실을 직시합니다.
우리는 차츰 미몽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처음에 우리는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대단한 기회를 잡은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컴퓨터 앞에서 일만 하는 일개 조직원이 되어 있었고 다른 애송이들의 배만 불려주고 있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가족이었던 적이 없었다. p.164
테크 업계에 종사한다고 해서 대단한 임무를 맡은 게 아니고 ... 그저 업무를 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무척이나 눈치 보이는 일이었다. ... 일이 시간과 노동력을 돈과 맞바꾸는 거래라는 사실을 왜 이렇게까지 쉬쉬하는 거지? p.282
실리콘 밸리에서 비개발자로 살아남기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실리콘 밸리가 고객 지원 팀에서 일하는 "비개발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적습니다. 저자의 남자친구인 "이안"은 로봇 공학 개발자로, 실리콘 밸리의 주인공이지만 본인은 그들을 지원하는 부수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것에 회의감과 자격지심을 느낍니다.
실리콘 밸리에서 비개발 직군의 소프트 스킬은 무시당하기 일수입니다. 고객과 소통하고 신뢰를 쌓는 일, 마케팅 언어를 다듬는 일은 전문적이지 않은, 부수적인 일로 취급됩니다.
실리콘 밸리에서 비엔지니어는 자신의 가치를 애써 증명해야 한다. ... 프로그래밍 언어나 애자일 개발과 달리, 감성 지능은 배워서 터득할 수 없음이 이미 입증되었고 인간의 공감 능력은 인공 지능이 쉽게 넘볼 수 없는 장벽이었음에도 소프트 스킬은 언제나 과소평가되었다. p.129
비개발 직군이 하는 일은 쉽고, 개발자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데이터 분석 스타트업 CEO가 술 취한 개발자들에게 고객 지원 업무를 맡기는 모습에서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CEO가 들어오더니 특별 공지 사항이 있다고 했다. 고객지원 팀이 쉴 수 있도록 오늘은 엔지니어들이 고객지원 업무를 대신하라는 것이었다. ... 나는 나중에야 그 사건의 숨겨진 의미를 깨달았다.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하며, 엔지니어들은 술에 취해서도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p.180
일터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비개발자에게 패배감을 안깁니다. 저자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며 주인공을 돕는 존재일 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세상이 어렴풋하게 보이는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이안만 그랬다. 나는 그것을 '돕는' 사람이었다. p.195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이안은 취업 시장의 장벽에 부딪혀 본 적이 없었다. 지위 상승의 기회와 선택권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변변찮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그는 몰랐다. 이안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내 연봉의 세 배나 되는 돈을 거뜬히 벌 수 있었다. ... 어쩌면 나는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능력을 지녔다는 자격지심에 매몰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p. 197
사업 초기 단계에 있는 스타트업일수록 개발자가 주축이 됩니다. 회사의 규모가 커지며 마케팅, 고객 지원 등 비개발자가 추가로 고용됩니다. 초기 멤버 위주로 혜택이 돌아가는 스타트업 분위기 상 개발자와 비개발자 사이에 눈에 띄는 차별이 있었을 것입니다.
실리콘 밸리의 여성 노동자로 살아남기
실리콘 밸리는 공학 계열 전공자가 주가 되며, 여성 노동자의 비율이 낮습니다. 몇 안 되는 여성 노동자로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며 겪은 여성 혐오는 노골적이지 않았으나 언제 어디서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애나가 실리콘 밸리에 있는 동안 여러 IT 기업의 직원과 CEO가 크고 작은 성범죄를 저지릅니다.
성차별과 여성 혐오와 성적 대상화는, 노골적이진 않아도 벽지나 공기처럼 사무실 어디에나 존재했다. p.170
... 오픈소스 커뮤니티의 문제점은 역사적으로 그것이 보이 클럽이라는 사실이었다. 오픈소스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여성의 비율은 전체의 5퍼센트가 채 못 되었다. 여성을 배제하는 언어가 그 커뮤니티를 지배했다. 기술 관련 회의나 컨퍼런스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남자 엔지니어들이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무대에 올라 거들먹거리고 잘난 체할 때, 여자 엔지니어들은 음흉한 시선과 깔보는 말들과 더러운 손길을 감당해야 했다. p. 254
실리콘 밸리의 돈과 권력에 대한 의문
저자는 젊은 20대 창업자들에게 몰려드는 투자금과 권력이 합당한 것인지에 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모두가 그들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현상이 아이러니하죠. 일전에 함께 일하던 출판계 종사자들이 테크 종사자보다 업무가 덜 중요하지도, 강도가 낮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나긋나긋한 미국 소도시들 출신의 야심 차고 거침없으며 오만한 젊은 남자들을 맹목적으로 신뢰했던 것이 나만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실은 전혀 아니었다. 한참 전부터 그것은 전 세계적인 증상이 되어 있었다. p. 225
장점이라고는 왕성한 호기심뿐인 사람들에게 사회를 통제할 열쇠를 쥐여 주는 게 옳은 일일까. 기존의 산업과 기업을 옹호할 생각은 딱히 없지만, 그래도 역사와 맥락 그리고 신중한 결정의 중요성을 무시해서는 안 되었다. p.345
실리콘 밸리를 떠나다
결국 애나는 실리콘 밸리를 떠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던 비효율적인 특성들이 자신을 특별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리콘 밸리 남자들에게 없고 내게만 있는 그 무언가는 지난 4년간 내가 바꾸려고 무진장 노력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테크 업계에 있으면서 나는 감정적이고 공상적이며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그래서 피곤한 나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 그러나 비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내게 있는 그러한 면들이 창업자들과 기술 전문가들이 우선시하는 가치보다 값어치 없지 않음을 나는 깨달았다. p.374
애나 위너는 현재 "뉴요커" 주간지에 기고 작가로, 실리콘 밸리와 테크 문화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저자가 실리콘 밸리를 아쉬움 없이 떠날 수 있던 것은 실리콘 밸리에 완벽히 물들지 않고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은 덕분입니다. 그 속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더라면, 그리고 테크 업계가 주는 안정감과 우월감에 취해 버렸더라면 이런 작품을 쓰지 못했겠죠.
결국 애나의 말이 맞았습니다. 그가 실리콘 밸리에 있는 동안 없애고 싶었던 "감성적이고 공상적이며,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면모는 "언캐니 밸리"라는 특별한 작품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애나가 실리콘 밸리에 있는 동안 부러워했던 개발자들은 이런 작품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애나가 가진 특성을 가지지 못했으니까요.
애나 위너 블로그: https://www.annawiener.com/ab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