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오늘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싶은 책은 마라톤을 좋아하는 제가 가장 추천하는 책,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2007년에 일본에서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2년 후에 출판되었습니다. 10년이 훨씬 지난 지난 지금까지도 에세이 분야에서 30위권 안에 있는 꾸준한 베스트셀러입니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는 “최초의 회고록”이며, 2005년부터 2006년까지 하와이, 도쿄, 뉴욕, 훗카이도 등에서 하루키가 마라톤을 훈련했던 기록과 함께 본인이 생각하는 달리기의 의미, 마라톤의 의미, 소설가로서의 삶 그리고 삶의 우선 순위와 가치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의, 좋아하는 작가의 생각과 일상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마음에 들어하실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하루키를 모르는 분들이다 하더라도 마라톤을 좋아하고 러닝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혹은 어 나도 한번 달리기를 해볼까? 하고 고민하는 분들이라면, 하루키가 말하는 '달리면서 변화하는 삶’, 마라톤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서 쓴 글을 읽고 분명 공감하시고 위로와 함께 응원을 받는 기분이 들거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래서 이 책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 1월 12일, 일본 쿄토에서 태어났습니다. 1979년 만 29세가 되는 해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첫 응모 소설로 바로 데뷔를 했고, 그 후 <양을 쫓는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노르웨이의 숲>, <해변의 카프카>등 소설과 에세이 그리고 인터뷰 번역서 등을 지금까지도 꾸준히 책을 내고 있는 분이시고 매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거론되는 세계적인 작가이십니다.
한가지 특기할만한 점은 이 분이 매년 꼭 마라톤을 풀코스 42.195km를 참가하시고, 2~3년마다 100km 이상을 뛰는 울트라 마라톤이나 싸이클링과 수영, 그리고 달리기를 함께 해야하는 철인3종경기를 뛰시는 걸로도 유명하지요. 저처럼 달리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는 점에서 하루키라는 작가를 좋아하지만, 제가 이 분을 존경하는 이유는 바로 이 분의 성실함때문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밤 9시, 10에 잠에 들어 다음 날 5시에 일어나 하루를 10km정도 뛰는 것으로 시작해 집에 와서 4~5시간 소설을 쓰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소설 쓰는 뇌와 다른 쪽을 사용한다며 오후 시간대에는 번역을 하거나 에세이를 쓰고, 저녁에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 그 다음에 바로 주무시는 걸로 유명하시지요. 이런 생활 패턴을 1년 365일 유지하고 계시구요.
저는 이렇게 무언가 자신의 일을 묵묵히, 꾸준히, 그리고 담담하게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와 저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싶게 만드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늘 저에게 그런 존경심과 함께 닮고 싶다는 생각을, 영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분의 작품들을 좋아할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롤모델로 삼고 있는 분이에요. 참고로 이 분의 이름을 한자로 풀이하면 촌상춘수, 마을 위에 있는 봄 나무, 라는 뜻이래요. 이름도 마음에 들어서 개인적으로 더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제가 강력 추천하는 책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마라톤을 통해서 삶이 바뀐 사람이라 - 이 책에서 하루키가 말하는, 달리기를 통해 체화되는 4가지 생각들 A) 혼자만의 힘, B)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C) 삶의 우선순위와 그리고 마지막으로 D) 방향 - 재능, 집중력, 지속력 - 대한 생각들에 무척 공감하기 때문이에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직업적인 영역에 있어서나, 타인과 우열을 겨루고 승패를 다투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다. 지극이 상식적인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있고 그것으로 세계는 성립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사람의 방식이 있다. 나에게는 나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 그와 같은 차이는 일상적으로 조그마한 엇갈림을 낳고, 몇 가지인가의 엇갈림이 모이고 쌓여 커다란 오해로 발전해갈 수도 있다. 그 결과 까닭 없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해를 받거나 비난을 받거나 하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 때문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건 괴로움 체험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ㅡ 그와 같은 괴로움이나 상처는 인생에 있어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라는 점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되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 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 경우를 말한다면, 소설을 계속 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와같은 생각에 따라 인생을 살아왔다.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결과적이긴 하지만, 자진해서 고립과 단절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그와 같은 타인으로부터의 고립과 단절은 병에서 새어 나온 산처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녹여버린다. 그것은 예리한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 내벽을 끊임없이 자잘하게 상처 내기도 한다. 그와 같은 위험성을 나 나름대로 (아마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말인데, 나는 신체를 끊임없이 물리저으로 움직여 나감으로써, 어떤 경우네는 극한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직감적으로.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누군가로부터 까닭없이(라고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비난을 받았을 때, 또는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하고 있던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 나는 언제나 여느 때보다 조금 더 긴 거리를 달리기로 작정하고 있다. 여느 때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만큼 자신을 육체적으로 소모시킨다. 그리고 나 자신이 능력에 한계가 있는 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한다. 가장 밑바닥 부분에서 몸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긴 거리를 달린 만큼,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의 육체를 아주 근소하게나마 강화한 결과를 낳는다.
화가 나면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분풀이를 하면 된다. 분한 일을 당하면 자기 자신을 단련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말없이 수긍할 수 있는 일은 몽땅 그대로 자신의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되도록이면 그 모습이나 형태를 크게 변화시켜) 소설이라고 하는 그릇 속에 이야기의 일부로 쏟아 붓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한 성격이 누군가로부터 호감을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감동해주는 사람은 조금쯤은(아마도 아주 적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호감을 얻는 일은 드물다. 협조하려는 마음이 없는 그런 인간에게, 도대체 누가 호의(또는 그와 비슷한 것)를 느낄 수 있겠는가?
(…)
자랑을 하는 건 아니지만(누가 그런 것을 자랑할 수 있을까?) 나는 그다지 머리가 좋은 인간은 아니다. 살아 있는 몸을 통해서만이, 그리고 손에 닿을 수 있는 재료를 통해야만, 사물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무엇을 한다고 해도 일단 눈에 보이는 형태로 바꿔놓아야만 비로소 납득을 할 수 있다. 지성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육체적인 인간인 것으다. 물론 조금쯤의 지성인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게 전혀 없으면, 아무리 뭐래도 소설은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머릿 속에서 순수한 이론이나 도리를 조립해서 살아가는 타입의 인간은 아니다. 경험에 의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이른바 사변을 연료로 해서 전진하는 타입도 아니다.
그보다는 신체에 현질적인 짐을 지우고, 근육에 신음소리를(어떤 때는 비명을) 지르게 함으로써, 이해도의 눈금을 구체적으로 조금씩 높여가게 하여, 가까스로 납득하게 되는 타입인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 나가면 사물의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품도 든다. 때로는 시간이 너무 걸려 가끄스로 납득을 했을 때는, 이미 때를 놓쳐버리게 된 경우도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애당초 나라는 인간이기 때문에.
전업 소설가가 되고 나서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 가게를 그만두고 서설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을 때, 우리 - 라고 하는 것은 나와 아내다 - 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생활 패턴을 일신하는 것이었다. 해가 뜰 때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되도록 빨리 자도록 하자, 라고 정했다. 그것이 누구나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생활이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생활 방식이었다. 이제부터는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되도록 만나지 말자. 그런 조촐한 사치가 적어도 당분간은 허용되어도 좋을 것이라고 니와 아내는 느끼고 있었다. 되풀이 하는 것 깉지만 나는 원래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인간은 아니다.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나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복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 그렇게 해서 아침 5시 전에 일어나 밤 10시 전에 잔다고 하는, 간소하면서도 규칙적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루를 통틀어 가장 활동하기 좋은 시간대라는 것은,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 그것은 이른 아침의 몇 시간이다. 그 시간에 에너지를 집중해서 중요한 일을 끝내버린다. (...)
다만 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으면 나이트 라이프같은 것은 거의 없어져버리고, 사람들과의 교류는 틀림없이 나빠진다. 화를 내는 사람도 생긴다. 어딘가를 가자, 뭔가를 하자, 는 권유가 있어도 전부 거절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정말로 젊은 시기를 별도로 치면,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가야 할 것인가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을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주위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류보다는 소설 집필에 전념할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의 확립을 앞세우고 싶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는 특정한 누군가와의 사이라기보다 불특정 다수인 독자와의 사이에 구축되어야 할 것이었다. 내가 생활의 기반을 안정시키고, 집필에 몰두 할 수 있는환경을 만들고, 조금이라도 질 높은 작품을 완성해가는 것을, 많은 독자들은 분명 환영해 줄 것이다. (...)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관념적인 인간관계이다. 그러나 나는 일관되게 그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적인’ 관계를, 나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것으로 정해서 인생을 보내왔다.
(…)
매일 계속해서 달린다고 하면 감탄하는 사람이 있다. “무척 의지가 강하시군요”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칭찬을 받으면 물론 기쁘다. 욕을 먹는 것보다 훨씬 좋다. 그런데 의지가 강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세상은 그처럼 단순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라고 해도 무방하다. 솔직히 말하면 매일 계속해서 달린다는 것과 의지의 강약와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인 것이다. 적어도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좋아하는 것은 자연히 계속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거기에는 의지와 같은 것도 조금은 관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할 수는 없다. 설령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오히려 몸에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소설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자질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재능이다.
문학적 재능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소설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필요한 자질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전제 조건이다. 연료가 전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달릴 수 없다.
그러나 재능의 문제점은 대부분의 경우, 그 양이나 질을 그 소유자가 잘 큰트롤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양이 부족하니까 약간 양을 늘려보고 싶다고 생각해도, 절약해서 조금씩 꺼내 가능한한 오래 쓰려고 해도 그렇게 생각대로는 되지 않는다. 재능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터져 나오고 싶을 때 저절로 분출해버리고, 나올만큼 다 나와 고갈되면 그것으로 책 한권이 끝나는 것이다. 슈베르트나 모차르트같이, 또는 어느 시인이나 록 싱어처럼 풍부한 재능을 단기간에 기세 좋게 소진하고, 드라마틱하게 요절해서 아름다운 전설이 되는 삶도 확실히 매력적이긴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별로 참고가 되지는 안흥ㄹ 것이다.
재능 다음으로 소설가에게 중요한 자질이 무엇인가 질문받는다면 주저없이 집중력을 꼽는다. 자신이 지난 한정된 양의 재능을 필요로 한 곳에 집약해서 쏟아 붓는 능력. 그것이 없으면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이 힘을 유효하게 쓰면 재능의 부족이나 쏠림 현상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나는 평소 하루에 3시간이나 4시간 아침 나절에 집중해서 일을 한다. 책상에 앉아서 내가 쓰고 있는 일에만 의식을 집중한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도, 보지도 않는다.
집중력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지속력이다. 하루에 3시간이나 4시간 의식을 집중해서 집필할 수 있었다고 해도, 일주일 동안 계속하니 피로에 지쳐버렸다고 해서는 긴 작품을 쓸 수 없다. 반년이나 1년이나 2년간 매일의 집중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소설가에게는 - 적어도 장편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 - 요구된다. 호흡법으로 비유해보면 집중한느 것이 그저 가만히 깊에 숨을 참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숨을 지속한다는 것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호흡해가는 요령을 터득하는 작업이다. 그 두 가지 호흡의 밸런스가 잡혀 있찌 않으면 몇 년 동안에 걸쳐 전업 작가로서 소설을 계속 써나가지 어렵다. 호흡을 멈추었다 이었다 하면서도 계속할 것.
이와 같은 능력(집중력과 지속력)은 고맙게도 재능의 경우와 달라서, 트레이닝에 따라 후천적으로 획득할 수 있고, 그 자질을 향상시켜 나갈 수도 있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이것은 앞서 쓴 근육의 훈련 과정과 비슷하다.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한계치를 끌어올려 간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그 수치를 살짝 올려간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계속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보답은 있다.
아쉬운 점은... 없습니다! 제가 팬이라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없거든요. 마라톤이나 작가가 목표가 아닌 사람이다 하더라도 분명 이 책을 읽으면 삶에 대한 공감과 위로와 응원과 함께 의지가 되는 것을 느낄 거라 믿거든요. 그래도 굳이 몇 가지를 뽑자면... 최신 기록이 없다는 점? 아무래도 이 책은 2005년과 2006년의 하루키의 마라톤 일지를 기본으로 쓰여져 있으니까요. 이제 만 70세가 넘어 법적으로 노인으로 정의되는 하루키라는 작가가 100세 시대를 넘어 2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지금 또 어떤 관점과 다짐을 가지고 마라톤을 통해 본인의 육체와 정신과 마음을 단련하는지, 알고 싶어지거든요. 그리고 - 만약에 마라톤 풀코스 42.195km를 완주하기 위해 어떤 훈련법이 필요한지에 대해 알고 싶다면, 사실 이 책은 적합한 책은 아닙니다. 그 부분에 대해 유일하게 하루키가 말하는 정보는 ‘마라톤 폴코스를 뛰기 위해서는 하루에 10km, 일주일에 최소 60~70km정도 달릴 수 있는 체력을 갖추고 있다면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다’, 이거 하나에요. 그래서 만약 시중에 나와 있는 마라톤 에세이들을 통해 마라톤을 뛸 수 있는 방법을 아시고 싶으시다면 조지 쉬원의 <달리기와 존재하기>를 추천드립니다.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분적으로 나뉘어서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에세이를 별로라고 하시고 또 그 반대로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하루키의 소설도, 에세이도 모두 좋아합니다.
아마도 하루키의 소설들을 에세이와 비교해서 별로라고 하시는 분들은, 비교적 덤덤하게 자신의 생각을 적는 에세이와는 달리 하루키의 소설들에서는 무언가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불쾌하게 하는 것들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그 이유가 바로 하루키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 세계에서만 존재하고 느껴지는 인간의 본능에 대해 다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러한 자신의 본능이 느껴질 때 불편하고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그러한 점이, 그러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책을 덮고 나서 끝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훌륭한 작품이란 그 세계를 접한 사람이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작품을 창조하는 사람이 마라톤까지 사랑한다니, 그리고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관인 건강한 성실함을 공유하는 작가라는 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척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꼭 읽어보시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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