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일1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인 Apr 13. 2023

31. 시각

시각장애인 가이드 러너 훈련을 마치고 왔다.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면 나가서 마라톤을 보라"- 캐서린 스위쳐


* 이 글은 2023년 1월에 쓴 글입니다.


1.

시각장애인 가이드러너 첫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울었다. 


새로 시작하는 모든 일은 늘 두려움이 앞선다. 처음 문 밖에 나가 1km도 못 걷고 돌아왔을 때도, 처음 헬스장에 나갔을 때도, 처음 마라톤을 뛰었을 때도. 수 천명의 러너들 속에서 혼자 덩그러니 느꼈던 그 폭력적인 밝음. 그 따스함에 들어가고 싶어 내딛었던 수십 번의 발걸음, 그리고 그 이상의 포기를 기억한다. 




2.

지금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에게 사람에 대한 믿음을 심어 준 것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러닝이라고. 


등록과 취소, 결제와 결석을 반복하면서도 꾸준히 혼자 마라톤을 나갔던 이유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배려, 도움 덕분이었다. 같이 뛰는 사람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이 혼자 나가 혼자 뛰어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 주자로 쩔뚝거리며 들어오는 나를, 마라톤에 있었던 그 낯선 사람들은 늘 기다려주고 응원해주고 안아주었다. 그것은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었던 사람에 대해, 인간에 대한 편견 하나를 기어이 깨뜨리는 감동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울림은 바로 마라톤을 뛰면서 늘 스쳤던 앞이 안 보이는 러너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뛰고 있는 가이드 러너들이었다. 그들을 보면서 정말이지,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2023년 새해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하는 러너가 되겠다고.




3.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새해가 되자마자 바로 합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애초 계획은 2023년 1월이 아닌 11월 JTBC 마라톤 풀코스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없었으니까. 


풀코스를 처음으로 시간 내 완주한 게 작년 11월이다. 그런데 어떻게 바로 1월에 가이드 러너를 하나. 훈련 자체도 무리라고 생각했다. 나 혼자서도 겨우 뛰는데 누군가와 함께 하는 가이드 러너가 된다는 건 아무리 좋게 봐도 만용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까짓거 나 혼자 뛰는거라면 무리든 욕심이든 만용이든 무슨 상관이랴. 하지만 이건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2인3각' 경기가 아닌가. 객관적으로 냉철하고 냉정하게 내 능력과 체력을 검토해 봤을 때 가이드 러너는 무리였다. 나는 인터넷에서 시각장애인 가이드러너에 대해 검색한 후 관련 단체 인스타를 팔로우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4.

당황했던 건 해당 인스타에서 새해 춘계 마라톤 훈련 공지가 올라왔을 때였다.

지금부터 훈련을 시작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아는 사람이 없으니 직접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 1월부터 바로 시작하게 되었다.


질문은 간단했다. 춘계 마라톤 가이드 러너들 훈련을 지금 시작하면 차후 11월 동계 마라톤 가이드 러너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언제 모집하냐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단순하게 11월 마라톤이면 10월부터 준비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공지를 보고 그게 전혀 아니라는 걸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사고 전개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 혼자 뛰는 것도 아닌 가이드 러너, 게다가 풀코스 가이드러너를 하는 게 목표라면서 대회 1개월 전이면 준비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다니.) 


단체에서는 11월 마라톤도 좋지만 지금 당장 춘계 마라톤에 함께 하지 않아도 함께 훈련을 시작하는 것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풀코스 가이드러너도 물론 필요하지만 풀코스가 아닌 10km 마라톤에 참가하는 사람도 많으니 10km 가이드 러너가 되는 것도 좋고, 그게 아니다 하더라도 그냥 다같이 1월에 시작하는 훈련부터 합류해도 좋다고 답이 왔다. 10km라. 10km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록이 목표인 분이라면 조금 힘들 수도 있지만 만약 기록이 목표인 분을 만난다면 나도 노력해서 실력을 쌓으면 되지 뭐. 그리고 꼭 같이 춘계 마라톤 참가 안하고 그냥 훈련만 같이 해도 괜찮다잖아. 부담이 사라졌다. 나는 좋다고 했고, 훈련 신청서가 곧 올라올거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5.

훈련 신청서를 작성하면서도 매칭에 대한 코멘트에 구구절절 10줄이 넘게 썼다. 

매칭 없어도 괜찮고, 훈련만 나가도 좋고, 목표는 애초 11월이지 1월이 아니었습니다 등등 등등등. 기타 등등등.


쓰면서도 긴장했다. 아 민폐가 되면 안되는데. 나도 러닝 실력을 더 쌓아야지. 근력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이제는 꼭 스트레칭을 러닝 전후로 꼬박꼬박 해야지. 그러면서도 여전히 이걸 써야 하나 저걸 써야 하나, 나가는 게 맞나 안맞나 하는 생각에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늘 그렇듯, 체기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우욱. 토할 것 같아. 속 쓰려. 




6.

며칠이 지나 문자가 왔다. 

나의 매칭 시각장애인 분 성함과 훈련 일시, 훈련 날짜. 


기쁘기도 했지만 역시나 또 걱정이 앞섰다. 아 그래도 일단. 나가야지. 또 덜덜덜 떨겠지만 그래도 나가야지. 하겠다고 했으니까 일단 가야지 현장에. 갔다가 그냥 다시 오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현장에는 가야지. 




7.

일요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가 훈련 시간.

사전에 매칭된 분과 인사를 나눌 예정이니 10여분 정도 일찍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긴장을 해서 6시에 자동 기상을 해 버렸다.


현장에는 정확히 15분 전에 도착했는데,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다. 아는 사람들은 전혀 없었는데도 이상하게 편안했다. 안타깝게도 나와 매칭이 되었던 분은 오늘 나오시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분과 함께 훈련했다. 시각장애인 한 분당 세 명의 가이드러너가 매치 되었는데, 만나자마자 인사를 하고 바로 수다 타임이 시작되었다. 처음 온 것 같지가 않았다.




8.

하지만 훈련이 시작되자 달라졌다.

먼저 30~40분정도 스트레칭을 하고 트랙에서 다같이 1시간 정도를 뛰는 시간을 가졌는데, 문제는 러닝이 아니라 스트레칭에서 발생했다. 


30분 정도의 스트레칭에서 문제(?)는 내가 코치님이 하시는 스트레칭을 보고 그대로 시각장애인 분에게도 설명을 드려야 하는데, 일단 내가 그 스트레칭을 그냥 나 혼자 따라하기에도 바빴다는 점이었다. 사실 몸에 무리가 좀 있기는 했었다. 부상 아닌 부상, 후유증 아닌 후유증이 있었는데, 병원에 계속 포비아 핑계대며 가지 않다보니 사실 이 날도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AR에서 했던 스트레칭과 워밍업을 비교해봤을 때 훨씬 더 간단한 동작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 따라하다보니 땀이 났고, 무엇보다 몸이 버거움을 느꼈다.


다행히 나를 제외한 다른 두 가이드러너 분들이 능숙하고 친절하게 시각장애인 분에게 설명을 잘하고 도움을 드렸다. 나는 그래서 이 두 분은 이날 훈련이 처음이 아닌가보다, 했는데 이 분들도 오늘이 처음이란다. 와아. 단순히 뛰는 체력 이상으로 여러가지를 다시 한번 스스로 점검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

트랙에서는 5km정도를 뛰었다. 

일찍 가셔야 해서 다같이 5km 정도를 뛰고, 나머지 시간과 거리는 가이드러너 세 명이서 함께 뛰었다. 


나는 가위바위보에서 이겨 매칭이 된 시각장애인 분과 함께 뛰는 영광을 누렸는데, 함께 '생명줄'을 잡고 뛰면서 많은 것을 알려주셨다. 끈을 잡는 법, 속도를 맞추는 법, 걸음을 일치시키는 법. 다행히 우리는 처음부터 발이 잘 맞았다. 그리고 대화가 즐거웠다. 마라톤을 왜 하게 됐는지, 목표가 무엇인지(그분도 나도 시간 단축이 아닌 거리가 목표였으며, 평소 뛰는 스피드가 같았다) 그리고 3개월 전에 풀코스를 완주했고 2개월 전에 크루를 시작했는데 크루 사람들과 같이 뛰는 것과 혼자 뛰는 것의 차이는 어떤지 등등. 즐거웠다.


나중에 가이드러너 세명이서 뛸 때도 즐거웠다. 이 단체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러닝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동마는 나가는지, 왜 가이드러너를 하고 싶어졌는지 등등등. 모두 유쾌하고 활발하고 예의바른 사람들이었다. 긴장감이 사라지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10.

처음으로 사진 찍는 사람을 전혀 모르는 데도 불구하고 환하게 화이팅을 외치며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늘 운동을 하고 사진 찍는 사람들이 어색하고, 마구 들이대는 사진기가 마치 권총같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날은 아니었다. 이 날 찍힌 내 모습은 나도 놀랐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도 환하게 웃고 있어서. 진짜 신나게. 즐겁게. 행복하게.



훈련을 마치고 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몸이 가벼웠다.



 

기대된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나에게 또 어떤 이들이 생길지. 


두근거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30. 문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