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about love

사랑의 부재, absence of love and family

by Amrita




#말의 중요성

“언니, 엄마 아빠가 제 방을 빼 버렸어요.” 외국에서 친하게 지내던 동생 C양이 부산을 방문해서 나에게 한 말이다. 한국에 오면 곧잘 놀러 오던 동생은 엄마 아빠가 자기 방을 빼 버렸다고 말했다. 어차피 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녀는 그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듯했고, 나는 그렇군요라고 밖에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 채 그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단순히 자신의 방이 없어졌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너의 방을 없앴다는 사실을 단호히 설명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말은 그녀가 느낀 감정을 알려주는 말이었다. 감정은 때로 많은 것을 알려주는데, 누군가의 담담한 설명이 만약 그 사람에게 가슴 떨리는, 돌이 땅 하고 떨어지는 정도의 충격을 주는 발언이었다면, 그 말은 다시 설명되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우리는 가끔 어떠한 것들에 대한 것을, 명확하게 설명해달라는 요구하는 걸 어려워한다. 만약 내가 생각했던 것이 맞으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난 그땐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할까, 나보다 나이도 많고 노쇄한 부모에게 해도 되는 발언일까, 이런 말하면 부장님이 날 엿먹일까 등등. 이런 측면에서 나는 요즘 꽤나 말이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나의 생각 없고 무모한, 과감한 어린 발언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주는 일 (나도 겪어봤으니)을 해서는 안된다고도 느낀다. 왜 우리는 남의 감정 살피는 일에 이토록 미숙한가. EQ는 마치 여유 있고 공감능력 높고, 예술성을 가진 누군가의 전유물은 당연히 아닌데. 그래서 내가 무게중심을 두는 생각은 어린아이의 상처에는 무조건 나이 든 사람 혹은 부모의 책임이 있듯이 말도, 공격적으로 건넨 사람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 사람이 나의 손윗사람, 나보다 권력 있는 누군가라면. 누군가에게 안 좋은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면 상대방은 사과를 해야 하는 게 맞다. 그리고 나는, 이건 위로부터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한 아무 생각 없는 말로 인해 누군가가 평생 안 좋은 기억과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면, 그 책임, 나에게 있는 게 맞지 않을까.



#가족의 존재

몇 주 지나 외국에서 알고 지내던 동생 D양과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커피를 마시고 나서 핫핑크색 신용카드를 내밀며, “언니, 엄마가 아직 나를 허락해” 엄마가 쓰라고 준 카드를 내밀며 “이건 내가 살게!”라고 자랑스러워하던 동생이다. 그녀들과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게 된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때 나의 고민거리기도 했던 소속감에 관련하여 가끔 생각한다. 가족이 주는 사랑이 뭘까? 그리고, 벨훅스의 책 올어바웃러브를 읽으면서 소속감, 가족으로 연결되는 사랑의 부재가 사실은, 꽤나 만연한 시대가 되었구나 하고 느낀다. 이 책은 참고로 2012년 처음 발간되어서 2019년에 11쇄가 발행되었다. 지금은 2026년, 14년 그리고 7년이 흘렀으니까 요즘은 더 심해졌을까, 아니면 사람들은 사랑, 가족 따위는 없어도 되니까 나만 잘살면 되라는 생각을 더 하고 있을까가 궁금해졌다. ChatGPT와 함께 얘기하며 내 감정을 추스를 수 있는 시대라는데, 기계가 사람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걸 절대 믿지 않는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가족이 대체될 수 있을까

서른이 지나고 나서, 부모의 곁에 “나의” 자리가 아닌 “자식”의 자리가 있는 것이어서 내가 아닌, 자식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늘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난 그들의 자식이었지만 기능적으로 한국에 속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여태까지 누군가가 자식의 역할을 해주었다면 나는 명목상의 이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는 자식이었다. 부모에게 이런 개념을 얘기하면 동의하지 못하며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말한다. 나 역시도 물론 내 옆에도 누군가는 늘 있었지만 그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때론, 우린 누가 명명해주면 어떤 상황이나 사물에 이름을 붙이게 된다. 물론, 내 가족은 아니었지만 기능적으로 그들은 내 가족이었던 것이다.





All about love 7p. 벨훅스.

사람들이 사랑에 등을 돌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어린 시절에 사랑으로 버림받았을 때처럼 가슴이 찢어지게 쓰라리고 아팠다. 사랑을 외면하는 것은 영혼이 사막지대로 들어서는 것과 같다. 정도가 깊어지면 전에 손을 쓰지 않으면 사막에서 길을 잃고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에 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사랑의 부재 현상이 초래할 위험을 경고하고 다시 사랑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하기 위해서다.





“언니, 사랑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닐까요?”라는 내 말에 함께 인턴쉽을 하던 언니가 날 가만히 쳐다본다. 한 번도 누가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은 없었는데 하는 표정으로. 나중에 들으니, 언니가 내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단다. 지금은 호텔 수영장에서 만난 사람과 함께 캐나다에서 잘 살고 있다. 우리 둘은 서아프리카에서 함께 살면서 힘든 현지살이에 프랑스어를 서로 배우고 주말엔 커피와 아이스크림, kpop스타를 다운로드하여 향수병을 해결하는 사이였다. 아프리카에 있으니, 당분간 연애는 과거 기억이나 탐색하면서 묻어두고 친하게 지내던 반년살이. 언니는, 사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본인만 그걸 몰랐다. 난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실천은 잘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고. 난 아직도 내가 사랑을 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사랑은 나중에 할게.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사실 사랑은 나에게 다 쏟아부어야 하는 건 아니고 늘 함께 있었으면 하는 그런 것이었다. 앞으로도 그게 변할까? 잘 모르겠다.



#사라진다는 것

사람이 사람을 버릴 수 있고 누군가가 자기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올바른 설명도 없이 타인을 ghosting 하는 개념의 행위를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놀란다. 그리고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여겼다. 나에겐 온전한 고스팅의 경험은 없었지만 유사한 경험을 겪으면서 그 관계를 돌아보니, 사실 그리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런 얕은 관계들이 외국생활을 하면서 계속 생겨났고 그 사이에 갖게 되는 미세한 상처와 흠집들을 처리하지 못해서 그 관계에 집착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 사람에 대한 집착이 아닌, 내가 가지고 있는 부정성과 미세한 어긋남을 해결하기 위한 집착에 가까웠다. 모든 것을 정확히 하고 확실한 걸 좋아하는 나에게 이러한 인간관계 어긋남은 아주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늘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서 어떠한 방식으로도 나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해 왔고, 나는 그들의 그 간접적인 제스처가 더 괴로웠다. 고통을 느끼는 레벨은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처사는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 나의 대응은 무응답이었다. 이미 많은 걸 줬기 때문에 더 이상 줄 것이 남아있지 않은 나에게 그들에 대한 대응은, 더 이상의 고통은 받지 않겠다는 나를 선택하는 결론처럼 나타났다. 사람의 에너지 레벨이 있는데 그들에게 줄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들은 더 이상 나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이 또다시 나에게 중요한 존재가 된다는 건, 내가 나에 대한 배신을 하는 경험과 같아서, 그런 상처를 나 자신에게 또 준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거의 가까운 게 아닐까. 내 선은 내가 정하겠다는 건, 늘 누군가에게 고통받을 때마다 내가 되새기는 말이었고 비슷한 상황을 가끔 겪을 때마다 왜 또 이런 상황이 일어났을까 생각하지만 답은 늘 같진 않다. 사람 일이 계산해서 되는 것도 아니기에. 그럴 때마다 내 인간경험의 베이스가 하나 더 생기는 거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을 때까지 10년은 걸린듯하다.


나는 인간관계에서 올바른 타당한 제대로 된 사람을 원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 그들은 내 사랑과 감정, 관심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결론을 지어버렸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에게 더 이상의 소모를 하는 건, 옳지 않다.



#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사랑에 등을 돌리는 이유가 뭘까.

누군가에게 기대하는 심리,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 너도 나에게 이렇게 해주면 좋겠다는 희망, 직접적으로 말할 용기가 없어서 타인에게 간접적으로 건네는 신호들, 그걸 읽어주지 못하거나 혹은 외면해 버리는 개인들이 의도치 않게 혹은 의도해서 주는 실망과 좌절감. 나는 이런 감정들의 해결책을 인류애나 공감이라고 내 무의식으로는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받고 싶은 만큼만은, 똑같이 받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혹 그가 그녀가 그걸 돌려주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을 비난하기보단, 사정이 있지 않을까 정도로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로운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게 내가 가지고 있었던 선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라도 없으면, 과연 인간관계나 세상에 대한 사랑, 기여 같은 가치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내 주변에 누가 이런 행태를 지속한다면 단호하게 경고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되고 싶다. 등을 돌리면서 본인이 받을 (그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도) 상처는 혹시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아니면, 오히려 없어져버렸으니 괜찮아요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세상에 사람도 많은데 이 정도 이별쯤이야 괜찮지 않을까요라고 가볍게 넘길까. 모든 이별이 동등하게 슬프지 않지만, 모든 상실에는 무언가가 따르는 것 같기도 하다.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노력해 온 지난 10년의 세월. 7개국을 살면서 느꼈던 소외감과 차별감, 나는 절대 한국에 돌아가도 같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감정을 믿지 않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다. 요즘엔, 내 감정에 너무 빠지지 않으려고 그 생각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그런 작은 다짐이 내 삶에 도움이 된다면.. 내 삶을 응원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에 사랑은,

많은 것들의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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