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아, 내게 남을 거니?

by 수수한

"내일 친구들이랑 7시 50분에 교실에서 만나기로 했어."

아이가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시간에 학교 안에 들여보내 줄까? 교실문은 열렸을까? 아이 아빠나 나나 못 미더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는 지금 담임 선생님께 그야말로 홀딱 빠졌다. 토요일은 그녀가 사무치게 사랑하는 선생님의 결혼식. 그 전날인 금요일 아침에 친구들과 서프라이즈 파티를 꾸미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마음 내가 너무 잘 알지. 6학년 때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 다가오는 졸업일이 안타깝게 느껴졌던 나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다.


"그래. 대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은 해두고 가는 거다?"

흔쾌한 나의 대답에 남편 눈이 동그래진다.

결혼식 전날 녀석들의 수선으로 귀찮은 일을 만들어드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앞섰지만, 이미 아이들은 만나기로 한 터. 혹시나 교문이 열려있지 않으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거나, 근처에 있다가 친구들을 만나 들어가라고 일렀다.


그래. 삶은 이벤트가 있어야 하지.




지나고 나면 선명하게 기억하는 순간은 파편과도 같다. 어떤 기준으로 선별되어 내 안에 남아있는지 의문인 기억들이 많다. 사무치게 좋았던 순간들과 진절머리 나게 싫었던 순간이라야 충분히 납득을 하겠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사무치고 이보다 더 진절머리 나는 순간들이 있었을 텐데 하필 왜 네가?라고 묻는다면, 분명히 한 자리 차지하여 민망스러울 만큼 대수롭지 않은 순간들도 있다. 작정하고 기억해야지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물론 작정하고 잊어야지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대부분의 행복했었다고 생각하는 시절들은 희미하고 뭉뚱그려진 애매한 기억들이다. 애써 더 많은 것을 생각해보고 싶은데 몇 가지 떠오르지 않거나, 정확한 워딩 그 자체를 기억하지 못해 못내 서운해질 때가 많다.




아이의 아침은 과연 놀라웠다. 여느 날과 달리 아이를 깨우지 마자 벌떡 일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널 낳고 거의 대부분이 지루하기 그지없었던 아침 식사 시간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으며, 이것저것 제 챙길 것을 챙기고 할 일을 했음에도 시간이 여유 있게 남았다.

"엄마가 결혼한다고 해도 이렇지 않겠다."

하나마나한 엄마의 시답지 않은 소리가 아이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지극히 싱그럽고 무결한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듬뿍 느껴질 뿐이었다.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이다. 그런 온전한 마음을 느끼게 해 준 아이의 선생님께 더없이 감사했다.

매일이 정신없는 아침이었는데 유난히도 시간이 더디게 간 아이의 아침. 먼저 나선 아이는 이른 등굣길에 때때로 전화를 걸며 내게 상황 보고를 했다.

"엄마! 교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왔어."

"엄마! 복도에서 친구들 만났어."


오늘의 시간이 너에게 선명하게 남을지, 희미하고 뭉뜬 그려진 기억일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이도 저도 아니고 잊힐 기억일 수도. 그렇지만 오늘 설렘 가득한 너의 목소리는 내가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서 이렇게 끄적여본다.

모든 것을 선명하게 기억해야지만이 좋을까 싶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욕심이다 싶었다가 더 깊이 생각해보니 저주일 수도 있겠다. 되려 아련하고 뭉근한 기억에,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참 좋은 마음이 드는 기분 좋은 통증에, 그때와 그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니까.



오늘 아침.

아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20분을 깨워야 일어났다.

그래. 모든 순간이 선명해지면 더 선명한 것은 있을 수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