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글방 수강생 혜령의 글
침실에 딸린 작은 베란다는 비어있었다. 빨래 건조대가 설치되어 있고 해가 잘 드는 자리지만, 건조기 덕분에 용도를 살릴 겨를이 없었다. 뭐든 잡아당기며 걸어 다니기 시작한 하늘(만1세, 남, 김포 거주)을 피하느라, 둘 곳 잃은 액자와 빈 화분, 크고 작은 카페트 따위가 쌓였다. 암막 커튼 너머에 방치된 곳에서 자리를 찾아낸 건 봄(만4세, 여, 유치원생)이었다.
찬 타일 바닥에 카페트를 펼치고 자신의 의자와 아빠의 젬베를 꺼내더니, 젬베를 테이블 삼아 간식을 올려놓고 시간을 보낸다. 이미 이 꼬마는 주방 팬트리 아래칸을 자신의 작업실이라 부르며 색연필, 스티커북, 그림 등 물건을 쌓았는데, 날이 풀리자마자 베란다로 진출한 것이다.
최근 발과 눈치가 함께 빨라진 하늘이 그걸 두고 볼 리 없었다. 봄은 하늘을 따돌리며 재빨리 간식 그릇을 챙기고 베란다로 나간 후 야멸차게 문을 닫는다.
ㅡ 들어오지 마!
야속한 것은 유리문 너머로 모든 게 보인다는 것이다. 하늘은 유리문에 찰싹 붙어 버둥대고 봄은 등을 돌려 앉아 간식에 집중한다.
ㅡ 엄마 여기는 아기들은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에요.
봄은 ‘엄마 너는 이해하겠지?’라는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제멋대로인 동생을 피해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5세 누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까. 어린이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걸 경험한 아이가 그걸 응용한 것은 아닐까.
재작년 겨울, 유모차를 탄 봄을 데리고 무중력지대에 방문했다. 예전에 갔을 때 신발을 벗고 들어가 눕거나 앉을 수 있는 좌식 공간이 있는 게 좋아보였다. 아이를 데리고 업무를 볼 때 이용하려고 생각해둔 곳이었다. 밖에서 일을 보는 사이, 나는 같이 일하는 피디에게 봄을 데리고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둘은 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무중력지대 매니저는 좀 당황한 눈치였다. 이런 경우는 없었던 모양이다. 청년들의 공간, 청년들이 공부하거나 일하는 곳인데 아이가 시끄럽게 할 수 있어서라고 했다. 내부에서 컴플레인이 있었다고 했는지, 혹시 있을 것이 염려된다고 했는지는 잘 기억 나지 않는다. 다만 그게 방침이라고 했다. 자신의 공간을 쉽게 마련하기 힘든 청년들의 어려움이 반영된 "청년"만의 공간일테지만, 그렇다고 노키즈존이라니.
ㅡ 청년 중에 애 엄마는 없어요?
나는 물었다. 답은 뭐 죄송합니다 정도였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청년예술단에 속해있었고 청년창업지원도 받고 있었다. 그 청년지원사업이란 것은 마치 워킹홀리데이 비자 같아서 그걸 놓치면 손해인 것 같았다. 지원 사업은 대개 문턱이 낮았고 나는 어느새 그걸 찾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청년으로 사는 건 고단했다. 시스템이 관리하는 청년은 실로 납작하다. 그 눌린 땅 위에서 나는 종종 삐죽 솟거나 흘러내렸다. 그들은 청춘 드라마 속 패기와 열정을 품고 있지만, 아직 선배들의 조언이 필요한 사람을 청년으로 그려뒀다. 멘토를 거부하는 청년이나 고분고분하지 않은 청년부터 결혼한 청년, 아이가 있는 청년은 메뉴얼에 없는 것 같았다. 어쩐지 내가 "청년" 행세를 하고 있다는 수치심도 느꼈다. 무중력 지대는 그 기분이 단지 기분만이 아님을 드러냈다.
ㅡ 엄마 왜 안에 들어갈 수 없어?
봄이 물었을 때 내가 뭐라고 답했던가. 매니저는 따뜻한 유자차를 만들어 나와 봄에게 그것을 주었다. 그도 나도 무엇이 문제인지 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나는 봄과 함께 자주 거절당했다. 무조건 아이가 시끄럽다고 하는 것도 싫지만, 아이의 안전을 위하는 척하는 카페나 아이는 아직 어려서 어차피 모르니까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극장이 더 싫었다. 그건 변명이었다. "일반인"의 세계를 지키려는, 아이와 여자들에게 권위를 과시하려는, 자본주의사회의 수익 구조를 공고히하려는,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을 피하려는 이들이 시작한 변명은 어느새 규범이 되어버렸다.
그것들은 이제 너무나 당연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나를 우악스러운 엄마나 요란 떠는 페미니스트로 만들곤 했다. 게다가 이제 와서 내가 이 균열들을 말하는 건 이기적이기도, 조금은 징징거림 같기도 했다. 내가 엄마가 되어서야 겨우 발견한, 아주 깊고 크지만 보기 좋게 가려둔 균열들. 내게 문제가 되고서야 겨우 겨우 알게 된 것들이다. 왜 너의 고요하고 편리한 세계 바깥을 진작 살피지 못 했느냐고,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다그친다.
한번은 신뢰하는 이가 쓴 글을 읽었다. 아이가 자라서 말귀를 듣기까지 아주 길게 잡아도 10년인데, 그 시기가 지나면 열리는 세계인데 노키즈존을 마치 흑인이나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건 과하다고 했다. 내가 도를 넘나 봐. 나는 자제했다. 내가 지나친 걸 요구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말들은 곳곳에 있었다. “극장에 굳이 아이를 데려가고 싶어?” “너도 혼자가 편하잖아.” “옛날에 엄마들은 어땠겠니.” “맡기면 되잖아.” “남편이 아이를 안 봐줘?” 나는 자꾸만 ‘더 편해지려는 이기적인 엄마’의 자리에 놓였다.
그러던 중 친구가 영화제에 출품한 영화 소식이 들려왔다. 합정에 있는 극장에서 진행되는 장애인영화제였다. 갈 수 있을까? 여러 번 시도했다가 실패했었지만 ㅡ 극장이나 호텔, 식당에 아이와 함께 들어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전화 따위 ㅡ 이번에는 어쩐지 용기가 났다. 사무국 번호를 확인한 후 관람 가능 연령이 있는지, 아이와 함께 영화관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물었다.
ㅡ 물론이죠!
나는 그 날의 통화와 영화관에서의 환대를 잊지 못한다. 차에 유모차를 싣고 봄을 카시트에 앉힌 후 씩씩하게 합정으로 갔다. 유모차를 휠체어 석에 두고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아이는 끽소리 한번 내지 않고 간식을 오물거리다가 잠들었다.
그즈음 깨달았다. 나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수혜를 받고 있구나. 장애인이 받아온 온갖 핍박을, 내가 출산 후 겪은 기이한 기울기를 생각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어.
아주 촘촘하게 우리는 이어져 있었다. 나의 불쾌함은 나라는 개인의 몫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야. 의심해야 했다. 나의 작은 불편은 다른 이에게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의심해야 한다.
시끄럽게 관크를 할까봐 7세 이상이라 써둔 극장에서 언제 박수를 치며 중얼댈지 모르는 20대 지적장애인이 공연을 볼 수 있을까? 유모차를 가게 밖에 세워야만 하는 카페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나 노인이 들어갈 수 있을까? 어떤 존재에 대한 차별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편의상 납득이 된다 해도 결국 다른 크고 무서운 차별과 연결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사실 조금 지쳐있었다. 한동안 오기가 생겨 각종 민원을 넣고 어디든 아이를 굳이 데리고 다니며 행동하고 바꾸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 정도로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난주에도 코로나 19를 핑계로 입구를 통일해 엘리베이터를 멈춰버리고 계단 이용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시립도서관과 저상버스가 없는 경기도버스와 마을버스 노선표를 보며 화가 났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노하늘존이라니. 들어오지 말라는 봄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나는 뭐라고 해줄 수 있을까.
작가 혜령
숙련된 배우가 없는 공연을 만듭니다. 두 아이를 키웁니다. 하마글방에서 글쓰기를 연습합니다. @generalkun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