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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글방 Apr 19. 2021

앞으로 올 사랑

하마글방 수강생 이름의 글

이 년 전 치아 교정을 시작하며 생각했다. ‘교정기 끼고 키스를 어떻게 하지?’ 주변에 교정기 낀 애인을 둔 친구에게 물어보니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만약 둘 다 교정기를 끼고 있다면? 한창 키스를 하다가 쇠와 쇠가 부딪혀 덜그덕 거리면 꽤 민망하고 쑥쓰러울 것 같았다. 교정하는 동안 교정하는 사람과는 키스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정을 하는 동안 키스를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교정을 하면 치석이 잘 끼기 때문에 거의 매일 물치실기를 이용했다. 얇고 강한 물줄기가 이 사이사이를 지날 때마다 고춧가루들과 작은 고깃덩이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혓바닥으로 치아를 쓸며 생각했다. ‘이 정도면 키스할 때 냄새는 나지는 않겠다.’ 아마 항시 키스의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지냈던 것 같다.


교정을 시작하기 전, 그러니까 내 왼쪽 앞니가 오른쪽보다 더 튀어나왔을 시절, 나는 대학을 막 졸업했고 거울 앞에서 앞니를 자주 들여다보았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의 앞니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 비해 유난히 작은 앞니, 송곳니가 아닌데도 끝이 뾰족한 치아들의 나열. 그는 작은 카페를 개업하여 한창 희망에 차있었다. 내가 갈 때마다 공짜로 커피를 주었다. 그가 준 카푸치노는 뜨끈하고 달큰했다. 웃을 때 작아지는 눈과 당황하면 허둥지둥대는 모습이 좋았다. 그가 처음으로 스쿠터를 태워줬던 날, 우리는 카페 냉장고 뒤에서 키스했다.


그 시절의 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에 그와 점심을 먹고 짧게 키스한 뒤 드리러 간 주일예배에서 자꾸만 양심이 찔렸다. ‘하나님, 키스하고 와서 죄송해요. 음란한 악의 기운이 사라지게 해주세요.’라고 회개 기도를 했다. 뉴스에서는 한창 목사를 상대로 한 미투가 터져나오고 있을 때였다. 담임목사는 청년들이 가장 약한 부분은 성적인 부분이라며 스킨십에는 백스텝이 없으니 아예 시작조차 하지 말라고 설교했다.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 스킨십’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마음이 움찔댔다. 내가 어디를 갔다가 예배에 온건지 아는 친구가 옆에서 내 허벅지를 꼬집으며 놀렸다. 그제야 나는 웃었지만 ‘스킨십에는 백스텝이 없으니 키스 이상으로는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온 그의 카톡에 이렇게 답했다.


“그런데 나 할말이 있어.

나 혼전순결이야.“


그는 처음에 자기는 성적욕구가 별로 없어서 괜찮다며 은은한 모닥불 같은 사랑을 하자고 했다. 그의 태도가 변하는 속도는 카푸치노가 식는 속도보다 빨랐다.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어 몇 번의 애무를 해주었다. 주일마다 느껴지는 죄책감은 내 몫이었다. 그당시 내 마음을 달래주었던 것은 삽입을 하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의 말투가 유난히 차가웠던 날, 퇴근을 하고 온 나에게 카페가 끝나고 노래방을 가자는 그의 제안이 너무 피곤했다. 나는 대신 너네 집에서 영화를 보자고 제안했다. 절대 서로의 팬티를 벗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의 집에 올라갔다. 약속은 하면 지키는 거니까.


준비되지 않은 마음과 질에 자기 성기를 욱여넣는 그의 움직임을 기억한다. 엄지손가락을 바짝 세워 그의 배 주변을 힘껏 찔렀으나 그의 배는 너무 두꺼웠다. 나의 괴성에 깜짝 놀란 그가 멈추었을 때 재빨리 앉아 옷을 주워입었다. 온 몸이 심하게 떨렸다. 그가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하며 자꾸 따라왔다. 동네 파출소 앞에 멈춰서 ‘저기 들어가서 니가 한 일 말하고 오면 이야기해줄게’라고 소리 질렀지만 막상 그가 정말 들어갈까봐 겁났다. 경찰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내 편을 들어줄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대학 내내 꿈꿨던 긴 여행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저예산 배낭여행이었기 때문에 건강이 매우 중요했다. 질염에 걸린 것 같아 찾아간 병원에서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HPV바이러스에 감염됐고 바이러스가 영향을 미쳐 자궁경부이형성증이 발생했으며 이것은 자궁경부암이 될 수도 있으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바이러스 전파자가 확실한 그에게 연락을 했으나 되돌아 온 것은 무책임과 비난이었다. 당시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꼭 안아주고 싶다.


짐이 들어갈 여유가 충분치 않아 린스 넣기를 포기한 배낭에 각종 영양제를 세 달분씩 챙겨 여행을 떠났다. 하루에 시차가 3번 바뀌기도 하고 정수기 물에서 쇠맛이 강하게 났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꼬박꼬박 시간을 지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엽산, 비타민D, 유산균 따위를 챙겨먹었다. 많이 걸어서 골반이 아픈 날에는 네이버에 ‘자궁경부암 증상’을 검색해서 뜨는 모든 글을 새벽 늦게까지 읽었다. 내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상실감이 들었다. 도미토리 옆 침대에 들리지 않도록 숨죽여 울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페미니즘에 흠뻑 빠져들었다. 당시의 일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각종 커뮤니티의 말들이 여과 없이 내 안에 쌓였다. 한남충, 비연애, 비섹스 같은 말들이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의문은 계속 쌓였다. 나는 왜 그를 신고할 용기가 없는 사람일까, 그를 왜 좋아했을까, 목사의 말에 왜 죄책감을 가졌을까. 무엇보다 ‘한남을 어떻게 만나냐’고 말하고 다니면서 교정기를 끼고 남자와 하는 키스에 대해 상상했다.


이따금 집에서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날이면 일부러 조금 돌아 이제는 망한 그의 카페가 있던 자리를 보곤 한다. 분노에 가득 찼던 어느 밤, 뜀박질을 하다가 발로 뻥 차 쓰러트리고 발자국을 마구 냈던 카페 입간판이 여전히 건물 구석에 있다. 이제는 낡고 먼지가 쌓여 흐려진 ‘커피’이라는 글자를 본다. 그대로 뒤를 돌아 도서관으로 걷는다.


엄마는 종종 엄마 친구 아들의 연봉이 6000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한 번 만나보라고 한다. 나는 귀찮다며 거절하지만 밤에는 군인이라던 그의 몸이 좋을지 아닐지에 대해 상상한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에 못 간지 1년 반이 넘어간다. 교회에 가지 않는 삶이 꽤 쾌적하다고 느낀다. 여전히 운전할 때는 가끔씩 ‘하나님, 제발 신호 안걸리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과 오해를 풀고 내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찾아가고 있다.


샤워를 하고 누워 인스타그램을 하다보면 교정 전의 내 얼굴이 뜨곤 한다. 사랑에 빠졌었던 나, 10kg 배낭을 들고 모스크바역에서 웃는 나, 크리스마스에 교회 트리 앞에 있는 나. 웃을 때 톡 튀어나오는 앞니가 늘 스트레스였는데 지금 보니 꽤 귀엽다. 힘들게 교정하지 말걸 그랬나 싶다가 이미 했는데 뭘, 하며 유튜브나 보면서 낄낄 대다가 잠든다.   


제목은 정혜윤 작가님의 책 '앞으로 올 사랑'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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