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글방 수강생 바다의 글
“욕구는 세계에 참여하고자 하는, 삶에서 풍요의 감각과 가능성을 느끼고자 하는, 쾌락을 경험하고자 하는 더욱 깊은 수위의 소망에 관한 것이다.” -캐럴라인 냅, 『욕구들』, p.18
나는 해변 클럽에서 만난 남자의 오토바이를 타고 그의 아파트로 갔었다. 그의 아파트는 해변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마을에 있었다. 중간에 혹시 ‘얘가 범죄 소굴로 나를 데려가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가 나의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침대에서 빨리 뒹굴고 싶다는 생각이 우세해졌다.
나는 섹스를 좋아한다. 맨살이 닿는 촉감, 상대방과 내가 서로를 격렬하게 원하는 느낌을 좋아한다. 사람마다 오르가즘을 경험하는 정도와 느낌이 다르다고 하는데 나의 오르가즘은 폭죽이 터지는 듯한 쾌락이다. 나는 그 감각들을 좋아한다.
직장에서 밀도 높은 업무를 할 때는 섹스와 자위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0에 수렴했다. 휴가를 떠난 열대 기후의 나라에서 매일 같이 해변에 있는 클럽에 갔다.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모든 것들이 3,5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남자와는 이틀 연속 만났다. 나는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했고 그는 멋지다고 답했다.
다행히 그는 살인마가 아니었다. 벗은 그의 몸은 매끈했고 익숙한 데오드란트 냄새가 났다. 섹스가 끝난 후 나는 그의 팔을 베고 누워 내 인생의 상처와 시시콜콜한 일상을 마치 냉탕 온탕 오가듯 이야기했다. 사실 내가 이야기를 했다기보다 그저 이야기들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고, 막을 수 없었다.
“이름 붙이지 못한 허기는 무시무시한 허기가 되고 자기 불신의 근원이 된다. 이는 욕구가 지닌 또 하나의 황금률이다. 우리는 논의하거나 탐색할 수 없는 것은 두려워하게 되고, 금지된 것에 끌리는 동시에 겁을 먹게 된다.”-캐럴라인 냅, 『욕구들』, p.91
충족되지 않는 허기. 내 삶의 화두를 꼽으라면 나는 충족되지 않는 허기를 꼽겠다. 가부장적이고 통제적이지만 기대와 애정이 혼재된 환경에서 나는 실수가 허용되지 않은 채 자랐다. 나는 나의 이전 세대의 여성들, 그리고 지금도 함께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이 느꼈거나 지금도 느끼고 있을 자기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일을 망치고 피해를 끼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어디에 있어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도, 내가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하나 더 얹어서 가족들 안의 관계에서 생긴 죄책감과 책임감, 강박 속에서 살아왔, 아니 여전히 살고 있다.
이것은 허기에 관한 이야기다. 몹시 굶어서 배고픈 느낌, 속이 텅 비어있는 듯한 허전한 느낌말이다. 나는 내 안의 허기를 잠재우기 위해서 배고프지 않아도 먹었고, 책을 읽었고, 관계에 집착했다. 무엇을 먹을지, 누구와 잘지 정하는 건 내가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 중 하나였다. 나는 섹스를 할 때마다 오르가즘을 경험했다. 섹스는 내게 허기를 즉각적으로 채워주는 수단이 됐다. 애인과 주기적으로 섹스를 했던 시기에 나는 덜 먹을 수 있었다.
“가장 모호한 욕망조차 하나의 얼굴과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목적이라는 특정성을 갖춘 채 다른 욕망인 양 다시 나타날 수 있다. 다이어트를 하는 여자가 ‘나는 날씬해지고 싶어’라고 말할 때 사실 그는 무엇이든 다른 특성을 갖길 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날씬함으로 대표되지만 그것으로 보장되지는 않는 가치 의식, 소속감, 사랑받는 존재라는 느낌을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캐럴라인 냅, 『욕구들』, p.102
다시 해변에서 만난 사람과의 섹스로 돌아간다. 나는 단순히 쾌락을 위해 하룻밤 섹스를 한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 글의 제목처럼 그와 결혼까지 생각하며 휴가가 끝난 뒤 사무실에 앉아 비행기 표를 찾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나는 내가 섹스를 했던 (거의) 모든 사람들과 관계의 끝에 결혼을 상정했다. 나는 분명 어떤 종류의 안정감을 갈망하고 있다. 원하던 회사에 들어갔고, 밤낮을 일했지만 나를 점점 소외시키고 있었던 그 무엇으로부터.
나는 그 공허감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주변에는 나를 이해해 주는, 적어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 했다). 직장을 그만 둔 이후 상담을 받던 중 처음으로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있다. 그때 느꼈던 해방감을 기억한다. 가족으로부터 받는 기대와 죄책감, 여러 책임들에서 자유롭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결혼을 원했던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내가 또 참을 수없이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결혼을 원했다고..? 지금 이 시대에..? 그다지 친분 없는 고등학교 동창들에게까지 페미니스트라고 소문난 내가..? 왜 그동안 독립하기 위한 저축은 하지 않았는지, 직장을 그만두고 또 집으로 돌아왔는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새로운 진단을 받았다. 질환의 주 증상은 고질적인 공허감과 감정 기복의 극단화, 사람에 대한 이상화와 평가절하 등이다. 질환을 겪는 상당수가 아동기 학대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불안정한 인간관계와 충동적인 행동을 보인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허기와 욕구에 대한 나의 해석을 계속 열어두기 위함이다. 병원에서 돌아온 날 나의 질환의 증상들을 읽고 또 읽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결혼을 생각하고, 명절 날 가족들이 모여있는 집에 있고 싶지 않아 나를 별로 좋아하는지 확신도 없는 상대를 찾아가 섹스했던 나의 과거들이 떠올랐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불안들이 구체적인 불안들로 대체된다. 우리에게 달라붙어 괴롭힐 무시무시한 사회적·개인적 질문들(세상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어느 정도의 공간을 차지할 것인가, 에너지를 어디에 쏟을 것인가, 자신을 위한 요구는 어느 정도 할 것인가)이 이 청바지의 맵시가 어떤지, 점심으로 무엇을 주문할지 같은 소형화된 새로운 틀에 담겨 작고 개별적인 질문들로, 구미에 맞는 한입 크기로 세분된다.” - 캐럴라인 냅, 『욕구들』, p.105
그렇다면 이제 다음 질문이 생겼다. 나는 아직 직업이 없고, 질환은 있고, 가족들과 함께 산다. 택시 아저씨에게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묻는 가수처럼 세상의 어디로 가야할지 잘 모르겠다. 내가 안전하고 충만감을 느끼며 머물 수 있는 물리적 공간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공간을 찾는다. 내가 '결혼'이라고 생각하며 원했던 건 단순히 집이 아닌 공간이 아니라 안전하고 충만감을 주는 관계, 소속감 으로 불리는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섹슈얼리티에 대한 글을 계속 쓰기로 했다. 써나가다보면 나의 고질적인 공허감과 불안이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그 전과 다른 모습으로 자라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작가 바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