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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글방 Mar 12. 2022

이대남의 하루

하마글방 수강생 원더월의 글

벌써 일주일 째 섹스를 못했다. 어제도 실패했고, 그제도 실패했다. 하지만 지금은 섹스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잠을 좀 자고 싶다. 어제 7시에 결국 여자애들이 떠나고, 우리는 패배자가 되어버렸다. 이게 다 현우 때문이다. 현우는 말하자면 헌팅의 신인데, 술이 과하면 애가 미쳐버린다. 어제 여자애들은 이미 다 넘어온 상황이었는데 괜히 마지막에 소주를 한 병 더 시켜서 그렇다. 아무튼 걔네가 떠나고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지막 발악을 했고, 여자만 보이면 말을 걸다가 결국 포기하고 집에 오니 아침 10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그러고는 기절하다시피 잠들었는데 전화벨이 계속 울리는 것이다. 주말에 전화가 올 데가 없는데 싶어서 폰을 보니 엄마였다. 옆으로 누워 휴대폰 좌측 버튼을 눌러 무음으로 바꾸고 눈을 감으니, 어김 없이 감은 눈 너머로 흰색빛이 쏟아진다. 눈을 겨우 뜨니 흰 배경 위에 부재 중 전화가 몇 통이나 와 있고 카톡이 몇 통 와 있다. 그보다 지금 시간이 벌써 7시가 넘은 걸 언뜻 발견하고는 다시금 질끈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생각을 해보려 노력한다. '어제가 불금이었으니, 오늘이 토요일이고, 내일이 일요일인데, 전화가 올 데가 어디있지? 저번에 번호딴 앤가? 아니면 저번 주말에 만났던 누난가? 아 그 간조 누나 이뻤는데 오늘 그 누나 만나자 할까.' 불현듯 기시감이 든다. 현우 코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 토요일엔 현우가 출근하지 않는다. 그러면 여자를 만나러 나갔다는 거다. 아. 어제 만난 애들 번호 딴 기억이 없는데, 배신자 새끼.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아들! 내일 사전 투표날인데 꼭 나라를 위해 2번에 투표해야해~^^]


폰을 켜니 온통 가족방 카톡이었다.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 유난히 짜증이 났다. 나도 2번을 뽑을 거지만, 이준석 때문에 뽑는거다. 근데 우리 가족들은 진짜 왜저러는지 모르겠다. 경상도 사람들은 다 저렇다지만, 우리 가족은 좀 유별나다.


'별 개소리. 진짜 태극기부대 같네. 도대체 엄마는 왜 저럴까.'


할머니는 안철수의 단일화 소식을 공유하며 '만세 만세 만만세'를 불렀다. 우리 할머니는 아직도 집에 박정희와 박근혜 사진을 걸어놓으셨다. 나야 뭐 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내 알바 아니니 거기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다. 한번은 신기해서 '우리 동네 굴국밥집에도 같은 사진이 있던데'하고 말한 적은 있는데, 그때 나에게 <전두환 회고록 1>을 선물로 주셨다. 박정희가 전두환이랑 친했었나? 뭐 나야 잘 모른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외에 온 카톡이 없었다. 짜증난다. 현우가 역시 대단한건가. 내가 부족한건가. 왜 똑같이 번호를 따고 술을 마셨는데 나한테만 연락이 없는지 모르겠다. 현우는 늘 그랬다. 현우와의 첫 만남은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바로 있었던 MT에서였다. 남중, 남고를 나온 나로선 '대학가면 여자친구 생긴다'는 말을 굳게 믿었으나, 쑥맥이었던 나로선 그다지 현실성있어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옆자리 앉아있던 몸 좋고 미니 불테리어처럼 생긴 친구가 불쑥 말을 꺼냈다.


"야, 우리 동갑이제. 반갑다. 어 근데, 니도 여자 좋아하제?"


남자들 세계에선 활발한 것, 주도권을 잡는 것이 엄청 중요하다. 서열을 은근히 반영하기 때문이다. 눈치보면서 선수를 빼앗긴 나이기에 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여자? 미친놈. 어디서 허세야. 나는 픽 비웃으며 말했다.


"여자? 좋지~ 여자야 뭐 꼬시기 쉽다 아이가. 그래 니 뭐. 지금 여자친구는 있나?"


그러나 현우는 전혀 위축되지 않은 채 내 눈을 또렷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없지. 그러니까 지금 안 카나. 지금 여기서 여자 꼬시긴 글렀다. 물이 안좋아. 그러지 말고 저기 옆 건물에도 MT온 것 같던데, 거기 가서 여자 좀 꼬셔보자. 내가 니 성격이 괜찮아보여서 그러는거다. 와꾸 딱 나오네!"


평가하듯 나를 위아래로 훝더니, 현우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는 주변 친구들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일어나서 뒤를 따랐다. 그리고는 우리는 옆의 다른 대학교 여자들과 만나 근처 호프집에서 맥주를 질펀하게 마셨고, 나는 앞서 온갖 허세를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실전에선 어버버거리느라 아무 것도 하지 못했지만, 현우는 파트너가 된 여자애와 꽤 오래 만났었다. 이름이 수민이었나? 수현이었나? 그랬었다.


현우 생각에 그때 과음했던 것까지 생각이 난다. 나는 술을 잘 못 마시지만 여자와 자려면 술을 많이 마셔야만 하기 때문에 언제나 불리한 조건인 것이다. 숙취가 몰려와 나는 거실 벽에 붙은 길다란 의자에 걸터앉아 물을 끓인다. 보광동에 있는 내 자취방의 구조는 특이해서, 현관 앞에 부엌이 있는 작은 거실이 있고, 그 옆에 침대방이 있는데 그 사이를 화장실이 툭 튀어나와 있다. 그래서 두 방은 좁은 복도로 이어져있다. 나는 거실의 화장실 벽쪽에 긴 의자를 만들어놔서 거기에는 사람이 세 명도 앉을 수 있었다. 컵라면에 물을 담고, 오늘은 그냥 쉬어야겠다 생각한다. 금요일에 마저 해야 하는 일을 마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들고 왔었는데, 남은 자료 정리할 것도 있고. 내일은 희진이와 진짜 약속이 있어서 오늘 마무리 안하면 큰일난다. 희진이는 몇 주 째 만나고 있는 두 살 어린 앤데, 몸매가 좋아서 좀 더 오래 만나고 싶다. 만날 때마다 향수를 너무 많이 뿌리고 와서 좀 역할 때가 있기도 하지만 뭐 그것도 나름 괜찮다. 희진이는 모텔에서 하는 데이트도 괜찮아해서, 일요일에 만나면 다음 날 출근하기가 편하다. 일찍 잘 수 있거든. 라면을 두 젓가락 쯤 떴을까, 다시 전화가 온다. 이번에도 엄마였으면 투표는 내가 알아서 한다고 뭐라 할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폰을 확인했더니, 현우다. 부리나케 전화를 받았더니 목소리가 너무 하이톤이다.


"야! 석훈! 뭐하노!! 빨리 나온나!!!"


아. 이건 현우가 아니라 한준이 목소리다. 김한준. 의대를 다니는, 키도 크고 와꾸도 되는 놈. 한준이는 내 고등학교 친구고, 현우는 대학교 친군데, 헌팅으로 맺어진 인연은 이 둘을 서로 더 친하게 만들어버렸다. 사실 나는 한준이가 좀 불편하다. 한준이랑 헌팅을 하면, 여자들이 아무래도 한준이에게만 관심을 주기 때문이다. 한준이가 와꾸파라면 현우가 매력파라, 현우랑 달릴 때면 그래도 내가 좀 더 낫긴 하기 때문에 할 만 한데 말이다. 한준이랑 고등학교 때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다. 원래 네임드와 언네임드 사이에는 벽이 있는 법이다. 어느 날 동창회를 갔다가 한준이가 솔로임을 들었고, 한준이와 현우를 내가 이어주었다. 그러다가 함께 헌팅하며 친해진 것이다. 내가 이어준 사이지만, 가끔 이 둘이 더 친해보이기도 한다. 다시 생각해봐도 좀 불편하다. 헌팅으로 내가 증명을 해야 하는 건데.


"야 나 현우야. 석훈아~ 안나오면 우리끼리 진짜 간다?"


"야 됐다! 니 혼자 도태되라~ 내는 치고 나갈게."


'하. 미친놈. 이걸 어떻게 참아. 하 비비랑 왁스만 발라야겠다.'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모두가 젊은 날 여자를 만나며 치고 나갈 때, 나 혼자 방구석에 처박혀서 도태되는 감정. 그 감정을 참을 수 없을 뿐더러, 여기서 한번 빠지면 이들은 평생토록 이 날의 이야기를 한다. 내 눈치를 살피며, 마치 자기들만의 비밀이 생긴 양. 비밀이 뭔지 알고싶지도 않지만, 워낙 은밀하게 이야기를 하고있으면 소외감이 극도로 사무친다. 남자들 모임은 여자 이야기가 팔 할인데, 내가 거기에 끼지 못한다면 나는 왕따나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저 말은 일종의 치트키인 것이다. 치사한 놈.


"삼십 분만 기다려. 갈게. 국밥 먹고 있어."


토요일 밤, 이태원의 국밥집에서 우리 넷은 그렇게 모였다. 현우랑 한준이, 그리고 웬 키 작고 통통한 한 남자애 한명. 얘네들은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데, 워낙 큰 소리로 떠들기 때문이다. ENTP와 ENFP의 조합이 절대 안 닥치는 조합이라 그렇다나. 글쎄, 그냥 태생적으로 시끄러운 애들인 것 같다.


"...그래서, 페미척결을 위해서 대동단결해야 한다 이거야!"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현우 목소리가 공기를 뚫고 들려온다.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해야만, 여가부도 없애고 무고죄도 정상적으로 늘려서 우리가 꽃뱀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


"야야 작게 좀 말해라."


현우 어깨를 툭 치며 나는 자리에 앉는다. 그러곤 처음 보는 키작은 애한테 어색하게 소개를 한다.


"어, 반갑다. 나는 석훈이. 아 참. 친구맞죠?"


현우가 껄껄 호탕하게 웃는다. 소리가 너무 커서 옆 테이블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다.


"야 시발, 친구 아니면 어쩔건데 반말하노? 하여간 이석훈 이새끼 웃긴 놈이다~ 암튼 여기는 내 고딩 동창이다. 오늘 같이 헌팅할라고 오랜만에 만나서 불러봤다."


"오랜만에? 근데 이렇게 우리랑 봐도 되나?"


"아니 야! 딱봐도 여자 좋아하게 생겼다 아니가!"


현우는 키 작은 그 친구 어깨에 팔을 턱 올리며 묻는다. 그 친구는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지만, 내심 좋아하는 표정을 짓는다.


"음. 나 사실 대학교 CC 잠시 한 것 말고는 여자 만나본 적이 없어. 현우 너가 그렇게 여자를 잘 꼬신다며? 나 좀 도와주라. 밥이랑 술은 내가 살게."


예상되는 흔한 전개에 실소가 나온다. 현우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크게 두어번 끄덕이더니, 몸을 앞으로 숙여 무언가 중요한 작전을 모의하듯 말한다.


"야 그러면 이렇게 하자. 나는 이 친구 지금 사실 7년만에 보는 건데, 오늘 인생을 구제해주기 위해 헌팅을 하러 가야겠다. 그러니까 우리 둘이 갈 테니까, 석훈이 니는 한준이랑 둘이 하면 되겠네. 혹시 합석하면 OB맥주집에서 보자."


네 명의 여자 무리는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관례처럼 둘, 둘로 찢어진다. 마음 속 아쉬움이 올라온다. 현우랑 다니면 내가 그날 여자랑 잘 확률이 훨씬 높은데, 한준이는 말도 잘 못해서 내가 다 말을 해야한다. 그러고도 한준이는 섹스에 성공한다. 다시 말해 타율이 훨씬 높다. 재수 없는 놈. 현우는 키 작은 친구를 데리고 길거리로 나간다. 그래도 저 친구, 오늘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헌팅은 처음이 엄청 어렵다. 게다가 키도 작잖아. 한번 매몰차게 거절당하면 몸이 얼어붙어버리게 된다. '불쌍한 놈, 오늘 고생 좀 하겠네.' 한번만 성공하고 나면,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디듯 알 수 없는 흥분이 몸을 감싸게 되고, 그 뒤로는 마치 담배처럼 끊을 수가 없다. 헌팅만큼 내가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있는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건 없거든. 다시 봐도 키가 작은데 손도 단풍손이다. 아무리 봐도 어려워보인다. 물론 현우랑 있으니 합석까지는 어떻게 되겠지만, 그거야 미스테리한 현우의 말 솜씨 때문이니 두 여자 모두 현우에게만 관심을 갖는다. 저 친구는 현우를 위해 자기 팟을 분리시키기만 해도 제 역할을 다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현우한테 욕도 들어먹고 실패했다는 좌절감까지 느낄 거다. 그게 자기 키 때문임을 아마 알테니까 더 수치스럽겠지. 나는 오늘 한준이랑 달려야 한다. 현우의 역할을 내가 해야한다. 문제는 내가 너무 피곤하고,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성욕도 없다. 뭐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야 한준. 어차피 말은 내가 다 걸거니까 내 마음대로 고를거야."


한준이는 말을 잘 못 건다. 아직도 쑥쓰럽다나. 그냥 말 자체를 잘 못한다. 잘생긴데다가 공부도 잘하면서, 왜 말을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거기에 확률을 걸어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와꾸파보다 매력파를 찾는 여자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하 이 비참한 세상. 정말 남자로 사는 건 쉽지가 않다. 이태원 길거리에서 우리는 말을 걸기 시작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나만 말을 걸고, 한준이는 못생긴 애들이라고 궁시렁대거나, 옆에서 나를 돕는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둘이 왔는데~"


"네~ 가세요~ 저희는 못생긴 남자 싫어요."


그래도 말로 거절하는 게 어딘가. 그냥 쳐다보지도 않거나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지르는 경우라도 있으면 더 위축되게 된다.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당하기를 수 차례, 아리따운 두 여인이 보인다. 긴 생머리에 딱 붙는 청바지를 입은 여자랑, 단발에 코가 오똑한 여자. 사실 두 명이 다 괜찮은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건 되든 안 되든 무조건 말을 걸어야 하는 거다. 초장에 관심을 끌어야 한다. 조금 강수를 둬서 말을 꺼낸다.


"어! 안녕하세여~ 어. 딱 보니까 우리가 오빠같은데? 오빠야가 가진게 돈이랑 매력밖에 없어! 오늘 먹고싶은거 다 말해!"


여자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음을 확인하고, 나는 말을 이어나간다.


"아 아니, 딱 봐도 어린 것 같더라고. 한 ... 스무살? 남자는~ 와꾸보다 매력인데, 그렇지 않아?"


물론 둘 다 확실히 누나인 것 같다. 하지만 여자들은 이런 말을 좋아한다. 어린 여자는 원래 와꾸파기 때문에 절대 꼬실 수가 없다. 애초에 이런 말이 먹히는 것은 스물다섯을 넘은 여자들인 경우가 많다. 아니나 다를까, 긴 생머리가 웃는다. 한준이가 투입된다. 한준이는 와꾸만 강조해도 되기 때문에,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이상 의사라는 직업을 잘 밝히지 않는다. 꽃뱀이 무섭다나? 자기 직업을 알게되면 여자들이 모텔에 가려다가도 마음을 바꿔 집에 간다고 한다. 연애를 하고싶은 거지. 하지만 한준이는 그냥 섹스를 원할 뿐이라서, 그게 더 곤혹스럽고 짜증난다고 한다. 콘돔을 뒤집어서 다시 안에 넣을까봐 언제나 물로 깨끗히 씻어 없애는 습관을 꼭 들여야 한다고 내게 수시로 말한다. 물론 나는 별로 그런 걱정은 안 드는데, 서럽기도 하다.


긴 생머리는 한준이를 위아래로 훝는다. 당연히 마음에 들겠지. 우리는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OB 맥주집으로 향한다. 가격도 싼데 분위기는 나름 괜찮고, 손님도 적어서 이야기하기가 좋다. 게다가 사장님이 서비스도 많이 주시고. 우리가 먼저 합석에 성공한 것 같다. 저 멀리 현우와 키 작은 친구가 보인다. 생각보다 더 고전하는 모양인데. 내심 으쓱해져서 당당하게 가슴을 쫙 펴고 술집에 들어간다. 긴 생머리가 한준이와 파트너가 된 느낌이니, 나는 단발 옆에 붙는다. 한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누나들인데, 꼬시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막상 넘어오면 섹스하기 더 쉽다. 한준이가 스윽 자리에 앉으며 작게 소근거린다.


"야 오늘은 내가 살게."


'미친놈, 당연히 니가 사야지.'


씩 웃으며 나도 자리에 앉는다. 술은 보통 남자끼리 엔빵을 한다. 여자들이 술값을 내는 경우는 없는데, 뭔가 고달프긴 하지만 어쨌거나 여자들은 우리를 먼저 헌팅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한준이는 의사란 놈이 OB맥주도 못 쏘는 걸 보면 어이가 없긴 한데, 의사라고 다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니더라. 군대를 3년 가고, 뭐 인턴을 5년인가 한다고 했다. 그 동안은 월급이 나보다 적을 때도 있다고. 나는 어쨌거나 좋좋소이긴 하지만, 나름 나쁘지 않은 중소기업이라 3천은 받는 편이다. 언젠가 이 새끼가 당연히 술 사는 날이 오겠지.


"야. 그래. 너네가 오빠해라. 오빠들은 그럼 무슨 일 해?"


긴 생머리가 흘러내린 앞 머리를 교포스타일로 뒤로 넘기며 묻는다. 세련된 옷차림과 말투로 봐서, 이들은 4년제를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헌팅은 눈치가 제일 중요하다. 2년제 애들과 4년제 애들은 접근법이 다르다. 자세히 보니 한준이 파트너는 약간 다부진 어깨에 탄탄한 몸매이니 운동을 좋아할 것 같고, 내 옆에 여자애는 마른데다가 키가 좀 작고 단발에 입술이 진하다. 웃음이 잔잔한데 변화가 크지가 않고, 코 옆에 작은 점이 도드라지는게 미술 쪽 아니면 인문대학 같다. 숨을 들이쉬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려 노력한다. 일단 내 직업을 밝히는 건 최후의 보루로 남겨둬야 한다. 처음부터 사실대로 불었다간 바로 까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왜? 우리 뭐 할 거 같은데?"


시간을 벌며 나는 한준이에게 눈빛을 보낸다. 그러자 한준이는 숙달된 표정으로 능청스럽게 말을 꺼낸다.


"아 아니, 그 전에 우리가 먼저 맞춰볼게. 일단, 스무살이라고 했으니까 너네는 대학생이고...전공은..."


여자들은 확실히 우리보다 연상이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맞춰보겠다고 하면 싫어할 사람이 없다. 합석에 성공해 우리는 생맥주와 먹태를 시킨다. 일단 술을 먹기 시작하면 이제 한시름 놓은 것이다. 한준이네는 분위기가 좋은데, 내 쪽은 반응이 영 아쉽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반응. 불안한 예감. 어쩔 수 없이 예상보다 빠른 개인기를 시작한다. 서울여자라는 것을 듣고는 <범죄와의 전쟁>과 <범죄도시>를 성대모사 한다. 확 분위기를 내쪽으로 끌고오는 것이 중요하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알파남이 돼야 여자를 꼬실 수 있으니까. <기생충>의 이선균 성대모사로 마무리를 하면서, 눈동자가 동그래져 크게 웃는 단발을 확인하고, 술게임을 바로 시작한다. 우리는 손병호 게임이라고, 해당되는 사항이 있으면 손가락을 접는 게임을 한다.


"이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접어."


한준이가 우리 쪽 분위기를 보고 비장의 한 수를 날리고, 단발이 접는 것을 보고 만족한다. 나도 이 질문이 오늘밤 역사의 분수령을 넘긴 것이라고 예감하며 긴장을 약간 놓는다. 이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나도 질문을 한다.


"나는 인만추보다 자만추다, 접어."


이것 역시 단발이 접는 것을 보니 마음이 완전 놓인다. 그 와중에 긴 생머리는 자만추가 뭔지 잘 모른다. 한준이는 '자'를 남성의 성기에 연관지어 드립을 치더니, 깔깔대며 웃고는 자연스런 만남 추구라고 말해준다. 그 뒤로 한참 술게임을 하면서 술을 먹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한준이 팟이 눈빛이 맛이 갔다. 한준이는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내 팟은 술도 별로 먹지 않고, 아주 멀쩡해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와꾸빨이야. 하, 난 어떡하지.'


내 팟에게 승부를 보기로 결정한다. 사실 이정도면 지금 만나는 희진이보다 나이는 많지만 훨씬 이쁘다. 게다가 희진이는 미래가 없다. 스튜어디스 준비만 하고 계속 떨어지는데, 코로나 때문에 스튜어디스가 더 힘들다고 한다. 잘 되면 무조건 갈아타야된다.


"나는 이석훈이고, 펀드매니저 하고 있어. 언제나 운명처럼 다가오는 사랑을 찾고 있었는데, 비포선라이즈처럼 오늘 그걸 만난 것 같아. 오늘 우리가 어떻게 되는 나는 평생 오늘을 잊을 수 없을거야. 우리끼리 자리 옮겨서 따로 한잔 할까?"


여자는 피식 웃더니 눈을 돌려 자기 친구를 살핀다. 여자의 옆모습을 보는데, 심장이 뛴다. 생각보다 훨씬 이쁘다는 생각이 든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말려 올라가있는 속눈썹, 그리고 오똑하고 높은 코를 바라본다. 나보다 코가 더 높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한준이 상대 여자애가 보내는 눈빛을 나도 본다. 저건, 자기는 함께 가고 싶으니 갈라지자는 눈빛이다. 내 옆의 여자는 뭔가 눈을 내리깔고는 작게 한숨을 쉰다. 마음이 조급해지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려 눈을 마주본다. 여자는 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기회를 노리던 한준이는 후다닥 일어나서 계산을 하고 나간다. 먼저 떠나는 한준이와 여자의 뒷모습, 저 당당한 뒷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이제 내가 실패하면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겠지.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 그래도 오늘 내 몫, 즉 한준이가 섹스를 성공하도록 도운 것은 충분히 했다는 생각에 부담감은 좀 덜하다. 우리는 이태원 골목의 조용한 소주집을 찾아 들어갔다. 작은 테이블을 마주보고 앉는데, 살냄새가 좋다. 향수는 쓰지 않는 것 같다. 나는 항상 여자 향수냄새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렇지만도 않나보다. 여자가 자연스레 소주를 시키더니 내게 묻는다.


"그래. 석훈아. 그럼 전공이 경제학인거야?"


나는 코인을 좀 해봤기에 펀드매니저라고 말한 것 뿐이다. 웬만한 애들은 잘 몰라서 그냥 넘어가지만, 이렇게 공부 좀 한 것 같은 여자를 만나면 상당히 곤란하다.


"어 그래 유진아. 우리 아까 전공 얘기하다 말았지. 너는... 미술 전공 맞지?"


유진은 실소를 흘린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야~ 나는 인류학과 전공했어. 그보다 이제 말해. 너 솔직히 몇살이야."


나는 아찔함을 느끼며 진솔함을 보이는 것이 더 유리할지, 끝까지 뻔뻔하게 나가는게 나을지 잠시 고민한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이 너무나 확고한 것을 보고는 마음을 굽힌다. 어차피 오늘 각이 안나온다. 진솔하게 말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 이렇게 된 거 하루 재미있게 이야기라도 해야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스물 여섯이고, 무역 쪽 중소기업에서 일해. 이건 진짜야."


백수가 아니라 면접을 봐서 합격한 거란 말이다. 숨길 게 뭐가 있나. 그보다 인류학과가 뭘 하는 것인지 몰라 도대체 말을 꺼낼 수가 없는게 너무 아쉽다. 대화의 기본은 주고받는 것인데. 무언가 자꾸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유진이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나를 쳐다본다. 아까 들었는데 성이 생각이 안 난다. 이름은 유진이. 예전에 만났던 간조 이름이 유진이라서 기억할 수 있었다.


"그래. 솔직히 말해주니 좋네. 나는 서른이고, 친구 취업 축하해준다고 이태원을 꼭 가고싶다고 노래를 불러서 같이 온거야. 이대에서 대학원 다니고 있고. 논문을 내야하는데 도저히 진전이 없어서."


서른. 역시 나보다 연상일 거라곤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더 많았다. 내가 모르는 세상에 사는 여자. 내가 아는 척 하기가 어려우니 상당히 곤란하다. 언젠가 내 여동생이 맨스플레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소릴 하는 거다. 여자들은 말만 그렇지, 실제로는 아는 게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 현우 말을 빌리자면, 가르침을 받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 동물이랬나. 나는 논문을 써본적도, 몇 번 읽어본적도 없지만 일단 질러야한다. 


"아 그렇구나. 네 살 차이면... 궁합도 안 본다는데 딱 좋네! 우리 진짜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아 근데, 논문은 어떤 내용이야? 뭐 그래프 그리고 그런건가? 고민이 뭔데. 나한테 다 말해봐. 내가 도와줄게."


의외의 순간에 유진의 눈이 반짝거린다. 뭔가 말하려다 말고, 소주를 따른다. 짠 하고 잔이 부딪힌다. 그녀는 원샷을 한 뒤, 머뭇거리다 말한다.


"아 사실 나는 정체성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논문을 쓰고 있어. 그러다 이번 대선을 보고 이십대 남자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그러더니 혼자 깔깔거린다. 이해가 안 가서 가만히 있으니 혼자 말한다.


"아 그게 아니라, 생각해보니까 웃기더라고. 나는 이대 다니니까 이대녀고, 너는 이십대 남자니까 이대남이잖아. 이대녀와 이대남의 대담. 그게 웃겨서. 그래 석훈아. 좋아. 도와준다니까 하는 말인데, 너는 이번에 투표는 할거야? 할거면 누구?"


뭐가 웃긴건지. 나는 이대에 대해선 타짜에 나오는 이대 나온 여자라는 대사밖에 들어본 적이 없다. 페미가 많다는 거랑. 아무튼 나가리다. 섹스를 떠나서 이런 식이면 대화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물론 현우는 가끔 여자들에게 술이 취하면 정치이야기를 하곤 했다. 왜 보수가 당선되어야 하는지. 나도 옆에서 수십번을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 도대체 이해하지 못할 장광설이다. 그래도 걔는 그러고도 섹스를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론 이런 이성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사실 이렇게 여자 페이스에 넘어가지 않도록 말을 끊거나 화제를 돌려야 한다. 그러다가 유진의 발그스름해진 볼과 약간 풀렸지만 반짝거리는 눈을 바라보고는 그냥 포기한다.


'그래. 이번엔 번호만 교환하자. 이렇게 된 이상, 오늘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하고싶다는 대화를 그냥 이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일반적으로 여자는 이재명을 좋아하고 남자는 윤석열을 좋아한다. 이재명은 페미를 지지하는 척 해서 여자 표를 받아먹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누구를 지지하는지 직접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인데, 문제는 언제나 페미다. 페미들은 표현의 자유를 검열한다. 다시 말해, 유진 누나가 페미에 잠식되었다면, 내가 여기서 윤석열을 지지한다고 말했을 때 나를 싫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억울한게 애초에 나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다. 페미가 싫어서 그럴 뿐인데, 아 이 누나 페미면 어떡하지? 걱정이 든다. 나는 나일 뿐인데, 잠재적 가해자로 욕을 먹고, 돈은 내가 다 쓰는데 한남충이라 놀림을 받는다. 안 그래도 여자 꼬시기 힘들어 죽겠는데, 페미때문에 더 어려워지는 거 같다. 아무튼 나는 유진 누나가 맘에 들기에, 확률싸움은 피하는 쪽으로 선택한다.


"투표는 당연히 해야지. 지지하는 사람은 당연히 비밀투표니까. 내가 말하긴 좀 그렇고. 하하"


유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음 그런가? 그치만 요즘은 아무나 자기가 누구한테 투표했는지 이야기 하던데."


하. 이러면 남자가 물러설 수 없지.


"아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솔직히 말할건데, 뭐라 하지 않기야 알겠지?"


"그럼. 너가 솔직하게 말해야, 나도 너한테 솔직하게 대할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독재 시절에나 누구 투표했는지 말 못했지, 이제야 뭐 무슨 상관이야~"


유진 누나는 씩 웃으며 등을 뒤로 기댄다. 마치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더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어야만 한다. 별 것 아닌 것처럼, 이미 많이 생각해 본 주제에 대해 말하는 듯 연기해야만 한다. 어깨를 으쓱하며 나는 자세를 앞으로 기울인다. 진지한 말투로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한다.


"그래 뭐 나는 당연히 남자니까 윤석열을 뽑을 수밖에 없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러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다시 눈이 반짝 빛난다. 소주를 다시 쭉 들이키더니, 보조개를 이쁘게 만들며 캬 하는 소리를 낸다. 볼이 조금 더 빨개진 유진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턱에 손을 괴더니 물어본다.


"왜 남자면 당연히 윤석열을 뽑아야 하는거야? 정책 때문에?"


정책. 윤석열이 여가부를 폐지하고 세금과 집값을 낮춰줄 것이란 것은 안다. 하지만 자세한건 모르는데, 그것이 티가 나면 안 된다. 나는 최대한 당당하게 말하기 위해 다시 소주를 들이키고는 큰 소리로 말한다.


"이게 문제는 페미니즘이야. 한국에선 성차별이 심하지도 않은데 오히려 역차별을 조장하거든. 오늘도 봐. 나는 언제나 여자한테 헌팅을 하기 위해 말을 걸어야 해. 여자들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는 결코 없다니까? 그게 바로 성선택이라는 거지. 동물들하고 똑같이, 어쩔 수 없는 거지. 게다가 남자가 돈도 써야해. 군대도 가야하고. 말 그대로 남자들이 차별받는 사회인거지. 그런데 사회는 어때? 정말 큰 사건의 피해자만 강조해. 피해자만 우선시하는 사회야. 나도 피해자가 입은 폭력에 대해선 속상해. 하지만 남자들도 폭행을 당하는걸. 우리도 힘들어. 하지만 페미는 여자들만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서 피해자로 만들어서 관심을 집중시켜. 남자들은, 이에 반해 아무런 집단과 연대를 갖지 못하지. 남자들은 잠재적 가해자일 뿐이지 피해자가 아니라고 여겨지거든."


한번 물꼬가 터지자 와르르 말이 쏟아진다. 사실 내가 직접 몸으로 겪은 이야기들이니, 그녀는 잘 모르는 사실도 많을 것이다. 물론 몇 마디 중간중간에 어려운 말들은 현우나 한준이에게 듣거나, 유튜브를 통해 배운 것이다. 현우가 요즘 자주 보내주는 유튜브인 '신남성연대'를 많이 참고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남자들은 외롭다 이거야. 이에 반해 페미들은 기세등등하지. 문제는 이걸 정치권에서 해결하기는 커녕 부채질하고 있다는 거야. 문재인은 완전 페미니스트인데, 언론과 미디어를 장악해서 공산당처럼 우리의 표현의 자유를 막고 있어.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돼. 하다못해 이젠 섹스하기 전에 동의서를 작성해야 할 판이야. 안그러면 다 강간죄가 성립될 수도 있거든. 물론 유진이는 안 그러겠지만 그치?"


누나라는 말은 고의적으로 누락한 것이다. 아무래도 여자들은 강한 남성을 좋아하는데, 동생은 그런 측면에서 상당히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페미니즘은 여성의 피해자성만 강조하고, 남성은 방치하기만 하고, 표현의 자유를 막는 것이라는 거지? 그리고 그게 문재인과 이재명이 하는 것이고.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네. 여기요. 참이슬 한 병 더 주세요."


유진은 은근슬쩍 이야기를 흐리고는 눈웃음을 친다.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거 다 넘어온 것인가? 이런 이야기가 섹스와 멀어지는 것이 확실하다는 본능적 감각이 술 때문인지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흐트러진다. 그래도 계속 시도는 해보면 되지 않을까? 아. 판단이 서지 않는다.


"석훈아. 근데 자유라는 게 뭐야? 그거 알아? 백년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의 기준은 남성이었어. 물론 백인이었지. 다시 말해, 우리가 말하는 대부분의 단어는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거거든. 정치적 올바름은 그것을 지적하는 거고. 그러니까 너가 말하는 자유도 백인 남성의 자유를 뜻하는 것일 가능성이 큰거 아닐까? 자 한잔 하자."


"그게 무슨 말이야?"


무의식적으로 소주잔을 집어들어 입에 소주를 털어넣지만, 무언가 반감이 들기 시작한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너무 불편하다. 왜? 무언가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본능적인 거부감.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서로에게 욕하거나 혐오 표현을 할 자유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 분명히 우리는 욕을 먹은 경우에 사과를 바라지. 그런데, 지금 '자유'라는 단어는 앞서 말한 것처럼 백인 남성이 기준이거든. 백인 남성이 함부로 말할 수 있었던 시대의 단어를 가치중립적인 것처럼 가져와서 말하는 거야."


"그러면 페미는?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은? 분명히 우리를 과잉으로 억압하는 것은 맞아. 어차피 난 내가 부자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 안해. 그래도 범죄자 취급은 너무하잖아. 이건 그러니까 뭐랄까 감정의 문제야. 윤석열 공약은 나만 모르는게 아니야. 윤석열 자신도 모를걸. 하지만 우리의 피해자성을 인정해주는 것. 관심을 가져주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생각해. 우리도 국민이잖아."


그러자 유진이 웃는다. 정곡이 찔렸다는 듯, 눈이 똥그래진다.


"맞아 감정. 재미있네. 조금 더 진지하게 얘기해봐도 될 것 같네. 석훈아.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여자이지만, 나 하유진은 단순한 페미니스트로 정의될 수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하지만, 가끔 원나잇도 하고, 담배도 피지만, 환경도 지지해. 고기를 좋아하고, 일본어를 오랫동안 공부했어서 일본 여행을 엄청 많이 가. 축구 보는 걸 좋아하고, 헤비메탈을 좋아해. 정체성 정치는 1968년에 이뤄진 혁명으로 생겨난 것인데, 한국은 그 때 박정희가 지배하고 있었지. 우리에겐 정체성 정치가 너무 늦게 들어온 것 같아. 하지만 이미 우리 현실은 개개인성을 중시 여기는 사회가 되어버렸는데 말이야. 이 모든게 혼재되어 있어서 나도 참 어려워."


'아, 하씨였구나.'


중요한 정보가 한둘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잘 기억해놔야, 나중에 이야기하기가 좋다. 절대 까먹으면 안될 정보들. 축구를 좋아한다니 좋네. 그런데, 그래서 페미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아니 잠시만, 원나잇? 이건 좋은 시그널인데.


"그러니까 페미가 너무 늦게 들어왔다는 거지? 근데, 아무튼 그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아니지, 이미 집단 정체성으로 하나로 묶는 정치, 피해자성을 강조하는 정치가 이미 통하지 않는 시대라는 거지. 문제는 한국 정치는 이제서야 그것을 추구하려고 하고 있고. 물론 그것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해."


"맞아. 피해자라니. 어처구니 없어. 오늘도 봐. 우리가 더 힘든걸."


유진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간다.


"나는 우파 포퓰리즘의 힘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해. 정체성 정치로 인해 피해자는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 완전한 정체성을 얻을 수 있어. 하지만 피해자가 아닌 집단, 특히 남성들은 그렇지 못하지. 그리고 그거랑 별개로 우리 사회는 정체성이 모두 해체되고 있어. 남성들은 불안하고,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누구' 때문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에게 우르르 몰려갈 수밖에 없는 거지. 그런데 난, 석훈이 너도 정체성이 뚜렷하게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데. 너 얘기 좀 해봐."


혼란스런 말들. 나의 정체성. 나는 어떤 사람인가. 모르겠다. 언제나 남들과 다르고 싶었고, 도전적인 편이었지만, 정작 내가 누구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되면 이미지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위축되고. <미움받을 용기>에서 나의 단점까지 받아들이라고 했지만, 헌팅을 해보면 안다. 단점은 단점일 뿐인걸.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려 소주를 입안에 털어넣는다.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술이 많이 올라 이제 연기를 펼치기가 힘든 정도다. 정신 차려야 하는데.


"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아직 젊고, 뭐라도 해야하는데, 답답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회사 다니면서 일하는 것도 어렵고. 좋좋소 봤어? 좆소 다니는건 진짜 정신적 노동이나 다를 바 없어. 나만 그런건 아냐. 친구들도 그래. 사실 취미도 딱히 없어. 좀 더 많이 놀았어야 하는데. 공부도 한다고는 하는데 어차피 공부머리도 딱히 없을 뿐더러, 더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잘되지는 않아. 부의 추월차선은 비트코인 뿐인데, 해보면 알겠지만 공부해도 잘 모르겠어. 도박같기도 하고. 암튼 그래. 외롭기도 하고, 속에서 화가 나기도 하고. 무엇보다 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데 아무도 이걸 달래주는 사람이 없거든. 그러니까 내가 달래줄 사람을 찾아야지. 봐. 누나한테 이렇게 털어놓으니까 얼마나 좋아."


생각해보면 여자에게 이렇게 말을 털어놓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친구들끼리야 비슷한 얘기를 자조섞어 가끔 했지만, 어차피 다 자기 얘기나 여자 얘기 하느라 바빴지 진지하게 들어주지는 않았거든. 우리는 한참 이야기를 더 나눴다. 누나는 이게 숙의민주주의 아니냐며, 자기 논문의 주제가 그거라고 한다. 다른 단어는 기억이 더이상 안난다. 우리는 보광동의 자취방에서 결국 한잔 더 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내가 술을 치사량보다 한참 넘어서 마셨기 때문에 나는 들어가자마자 기절해버렸다. 눈을 뜨니 유진은 사라져있었다. 아 젠장. 번호도 없다니. 폰을 보니 어제 연락이 안된다고 희진이가 화가 많이 나 있었고, 친구는 투표 인증샷을 보내왔다. 두 손가락을 편 채 포즈를 취하고 있는 걸 보니 2번을 찍었다는 이야기겠지. 


희진과의 약속은 결국 취소했다. 내가 취소했다기 보다는 취소당한 것에 가깝기는 하지만. 안그래도 뭔가 마음에 걸리는 만남이었는데, 그냥 더 이상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사전 투표를 혼자 하러 가기로 했다. 가는 길 차가운 바람이 내 온 몸을 적셨다. 글쎄, 나는 어떤 대통령을 원했던 것일까? 아니, 그게 질문이 아니었었나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줄 사람을, 선거를 통해 찾고자 했던 것 같다. 유튜브에는 이준석과 홍카콜라 뿐이었으니까. 근데 이젠 잘 모르겠고, 고민이 된다. 투표소에 유진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리는 없겠지. 처음으로 진정성있게 뭔가 진중한 대화를 나눈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쓸쓸하다. 사랑인걸까. 아 너무 아쉽다. 옆에서 선거 얘기가 계속 들려온다. 이번 선거는 유달리 박빙이라는데, 처음으로 공약을 한번 볼까 생각이 든다. 누가 되든 내 삶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뭐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좋은 거니까. 무언가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는 것 같다. 하지만 은근히 기분 좋은 무거움이다. 언젠가 유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녀와의 대화가 머릿 속을 맴돈다.


작가 원더월

(만)20대의 막바지를 맞이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가명이 '서른즈음에'가 아닌 것은, 나이에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아서. Wonderwall은 '오아시스'의 노래명을 차용했는데, 그에게 뜻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돌아온 답변이 "무슨 상관이야. 멋있으면 그만이지." 맞다. 인생에 뜻이 뭐가 중요한가. 멋있으면 그만이지. 그런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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