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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협 Apr 09. 2024

#이문재 작가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이문재 작가도

박준 작가가 소개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소개해 준 허수경 작가에게서

이문재 시인을 소개받았기 때문이다.


허수경의 책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에서

그녀는 이문재 시인에게 쓴 편지를 첫 번째로 두었다.


그게 궁금해서 생전 부지의 그를 검색해 보았고,

그의 산문집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를

이번에 읽게 된 것이다.


이문재 시인의 산문은

온탕이라 생각하고 들어갔다가

열탕인 줄 알고 화들짝 놀란듯한 느낌을 준다.


한 편 한 편 대충 정리된 글이 없다.

짧은 글들인데 각각 길게 느껴지는 이유다.

  

◆ 책 읽다가 날것 그대로 쓰다


'인도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자인 라다크리슈난이 남긴 경구다. '조금 알면 오만해진다. 조금 더 알면 질문을 하게 된다. 거기서 조금 더 알게 되면 기도하게 된다.'(p11)' - 직장에서 직급이 올라갈수록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점점 좁아짐을 느꼈었다. 몇 십 년 경력이 무색해지는 그런 벽들을 종종 만나게 되면서 그때 나도 기도하게 되었다. 이 경구처럼. 뼈저리게 내 능력의 한계를 느끼는 그제야 주님께 그 문제를 내어드리게 되었다. 그동안 오만했음을, 질문조차하지 않았음을 반성하면서. 은퇴 후에도 여전히 내 힘을 의지하려는 것이 태반이지만 그럴수록 더욱 기도하려 한다.


'스튜어트 브랜드는 <느림의 지혜>에서, (생태론적인 아이디어지만) 내가 있는 이 곳을 넓게, 내가 있는 지금을 길게(Long Now Big Here) 하라고 권유한다.(p22)' - 위로가 된다. 지금과 여기에 대한 스스로의 해석이 진정한 휴식을 준다는 것. 지금 어느 카페에 앉아 이문재 시인을 만나는 이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여기 둘이 앉을 수 있는 탁자에 앉아 있지만 마치 넓은 강의실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 이것이 바로 Long Now Big Here가 아닌가!


'디지털 문명의 요체는 기다림을 삭제했다는 데에 있다.(p43)' - 카톡을 받으면 즉답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씹는다고 오해받는 세상이다. 택배도 당일에 오는 것이 당연해지고 있다. 도처에 디지털 문명이 지금 당장을 속시원히 해결해 주면서 기다림의 미덕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이 조급증에 시달린다. 갈등의 깊은 요인이 되고 있다. 나 또한 그것에 자유롭지 않다. 중학교 시절 미국 소녀와 펜팔 하면서 보름 이상 그 답신을 기다렸던 그때의 나는 지금 어디로 갔는가?


'내가 김훈 선배의 후배라는 사실만큼은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p203)' - 이문재 시인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김훈 작가와의 연이 정말 깊었구나. 시인의 시에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작가들의 관계. 사석에서나 이야기할 법한 글들이 담긴 산문이 이래서 좋다. 이전에 김훈의 책은 한두 권 읽은 적이 있다. 잠시 그를 잊고 있었는데 다시 그를 생각나게 해 준 이문재 시인에게 감사하다.


- 헤리의 반려책 이야기  ​   ​


나는 바빠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세상은 너무 바쁘게 돌아가서, 세상의 어제와 내일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바쁜 나와 바쁜 세상이 맞물려 대단히 바빴다.  

바빠서 나를 돌아보고, 둘러보고, 내다볼 수가 없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 비슷한 그 무엇(들)이 정신없이 살았다. 내가 그토록 바라마지않는 나는 게을러 터져 있었고, 이런 게으름은 부도덕했다. 아름답지 않았다. (p12)


모든 글쟁이들이 입을 모아 하는 넋두리가 있다. 글쓰기는 언제나 처음이라고. 백 편의 글을 쓰면, 그만큼 글을 쓰는 노하우가 늘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시든, 산문이든, 일기든 글은 매번 첫사랑처럼 다가온다. 도무지 알은체를 하지 않는다. 매번 통사정을 해야 한다. 첫 문장 쓰기가 첫사랑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힘들다. 그것도 갈수록 힘들어진다. 내가 제대로 게으르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p15)


오늘 처음 본 것이 없다면, 또는 익숙한 것들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대량 소비 사회의 완벽한 소비자이다. 그 사람은 기업의 충실한 '노예'이다. 그리고 그 하루야말로 완벽하게 '눈먼' 하루이다. 깨어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서 우뚝 서 있는 삶이다. 광고가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삶, 관습이나 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이 옹호하는 삶, 붉은 이념이나 가치가 아니라 다름 아닌 나 자신이 지향하는 삶이다.(p109)


- 이문재의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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