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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렙백수 윤준혁 Sep 25. 2019

#5 목숨을 건 도항

흑선의 등장과 요시다 쇼인

#5 목숨을 건 도항

흑선의 등장과 요시다 쇼인

- 백수는 다크투어 중

https://brunch.co.kr/@herman-heo-se/85


  1853년 에도막부의 쇄국 체제가 종결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흑선’의 등장이다. 당시 일본은 17세기부터 영국·스페인·포르투갈과의 교역을 중단하면서 선박의 입항을 금지시키고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出島)에 있는 네덜란드의 상관(商館)을 통해서만 교역하고 있었는데 미국으로선 아시아 권역의 보급지로 일본의 개항이 필요했다. 1846년 동인도 함대 사령관인 제임스 비들(James Biddle, 1783~1848)이 두 척의 함선을 이끌고 도쿄만(에도만) 입구인 우라가(浦賀, 지금의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로 가서 통상을 요구했지만 막부에게 거부당했다. 이에 미국의 밀러드 필모어(Millered Fillmore) 대통령은 일본에 다시금 통상 압박하기 위해 매튜 페리(Matthew C, Perry, 1794~1858) 제독을 동인도 함대 사령관이자 일본 특사로 임명하고 도쿄만(당시 에도만)으로 향하게 했다. 당시 페리의 함대는 서스쿼해나호·미시시피호·플리머스호·새러토가호 등 증기선 2척 포함 총 4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73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미국 함대는 공포탄을 발사하고 함포 사격훈련을 하는 등 일본을 계속해서 압박했고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요시(德川家慶)가 병중이라는 이유로 1년 뒤로 협상을 미루는 것으로 페리 함대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13세기 고구려·몽골의 여몽연합군의 침략 시도 이후 처음으로 외세의 침략을 맞이한 일본은 페리 함대의 선체가 검은색이었기에 이 사건을 ‘쿠로후네 라이코’, ‘흑선내항(黑船來航)이라고 불렀다.


  메이지 산업유산과 관련된 전시가 진행 중인 메이린 학사의 별관의 웅장한 흑선의 그림과 무섭게 그려진 페리 제독의 초상화를 보면 당시 ‘흑선내항’이 일본인에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이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페리 제독의 초상화



  한편 쇼인은 유람에서 얻은 지식과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1811 ~ 1864)이라는 스승을 만나 병학과 국제정세에 대한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런 쇼인에게 에도 앞바다에 나탄 흑선은 두려움과 흥미의 대상이었다. 페리 함대의 함포사격훈련 위협으로 주민들은 피난을 떠나고 미국의 무력을 확인한 막부 역시 후일에 굴욕적인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사쿠마 쇼잔, 요시다 쇼인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서양 열강의 무력으로부터 일본을 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쇼잔은 외국 함대에 대응할 수 있는 함선, 대포와 같은 무기를 갖추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의 젊은이들이 유학을 통해 본격적인 개화를 준비해야만 일본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무단으로 해외로 나가는 것은 사형에 처해지는 중죄였으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쇼인은 적극적으로 해외로 나가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당시 네덜란드를 통해 총기를 접하고 이후 양산하기 시작했다.





  1년 뒤 막부 정권과 약속한 페리가 이번에는 9척의 배를 이끌고 도쿄만으로 진입했다. 쇼인은 페리 함대를 통해 미국으로 떠날 계획을 세웠고 페리 제독에게 도항을 허가받기 위한 편지를 지닌 채 에도로 출발했다.




 “책을 통해 미국의 문물을 알게 되었고, 직접 가고 싶었지만, 일본의 법률이 엄격해 해외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배 안에서 무슨 일이든지 할 테니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편지가 노출되면 우리는 사형당할 수 있기 때문에 비밀을 지켜주시길 바라며, 어두운 밤에 조각배를 타고 함대에 접근하겠습니다.” - <쇼인의 편지 중>     




  페리 제독은 일본을 위해 자신을 찾아온 쇼인의 행동에 크게 감동했지만 화친 조약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막부와의 마찰을 우려해 도항 요청을 거절했다. 후일 일본 원정기(Japan Expedition, 1854)에서 위 사건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이 사건은 우리를 매우 감격시켰다. 법을 어기고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지식을 넓히려는 두 청년(요시다와 제자인 카네코 시게노스케)의 뜨거운 열정에 놀랐다. 일본은 학문을 좋아하고 탐구심도 강하다. 이 두 청년의 계획만큼 일본 국민의 탐구정신(도전정신)이 얼마나 강한지 나타내는 것은 없다. 지금은 엄격한 법에 억눌려있지만, 만약 모든 일본인이 이 두 젊은이와 같다면 일본은 미국만큼 강대해질 것이다.” - <일본 원정기 Japan Expedition>

    




수동 선풍기의 모습



당시 외국과의 교역은 의학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에도 쇼인은 제자들에게 어떤 일을 큰일을 이루겠다는 큰 뜻을 품었다면 죽을 각오로 열심히 할 것을 주문했다. 쇼인의 사상과 병학 이론은 우리나라를 침탈하기 위한 기반이 되었지만... 열강 속 일본이라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 30도 안 되는 나이에 목숨을 건 도항을 계획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에겐 큰 용기이자 영웅적인 면모였을 것이다. 


  쇼인의 도항 일화를 듣고 내 모습을 통해 요즘 청년을 돌아보았다. 언제부턴가 세상살이가 팍팍해지니 청년들은 너도나도 내 안위를 지나치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릴 적만 해도 대통령, 과학자 하다못해 세계를 바꿔보겠다는 허황된 꿈들이 있었는데... 그런 청소년들이 자라나더니 꿈들이 다 공무원으로 바뀐 지 오래다.

  수십 년, 수백 년 전엔 우리나라에도 나의 어려움보다 나라의 곤경에 피가 끓어 투사가, 열사가, 지사가 된 청년들이 많았다. 나의 몸과 혼보다 내 나라와 조국을 더 생각했기에 우리는 독립을 맞이할 수 있었다. 나라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우리는 과거에 비해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목표의 크기가 줄어든 게 아닐까? 연초에 백수 선언을 할 때쯤 내게 던진 질문을 되뇌며 메이린 학사를 나갔다.


‘과거를 답습해 현재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일까?’
  







본 글은  우리도 모르고 있던 아픈 사실을 찾아내고, 일본이 감추려는 역사적 사건들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크투어 일기입니다. 우리 역시 역사인식이 필요합니다. 알아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백수는 지금 다크투어 중>



#만렙백수윤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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