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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냥 Aug 26. 2023

병잉크가 바닥을 보인 날

대안연구공동체 D Lap 참여 중

대안연구공동체 D Lap에 참여하겠다는 맘을 먹고 나서 랩장 님에게 이런 메시지를 받았. 오래전에 온갖 빨갱이들 모인 지하조직에 들어오란 선배의 오다를 받았을 때만큼이나 떨렸다. 꾸준히 글 쓰고 공부한다는 약속. 이 약속의 무거움. 두렵지만 냅다 복종하고 싶은 마음.

 

평균 이상으로 가방끈을 늘여놨지만  공부는 실용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대학에 두 번 갔는데 한국사를 전공하고는 운동권이 되었고, 건축공학을 전공하고는 건설노조에 가서 활동을 했으니. 그러고도 제도교육 쪽으로 가든 안 가든 계속 공부는 놓지 않았다. 공부는 쓸데없는 일이었고 공부해서 뭐 할래? 또 공부냐, 지겹지도 않아?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늘 있었다. 공부는 쓸데없어서 아름다운 것이니 냅두고 님들 길이나 가시오~로 싹 무시. 지들이 공부 안 하면 그만이지 왜 얌전히 공부하는 사람에게 쓰잘데기없는 딴지를 걸어대는지, 그들은 쓸데없는 공부하는 재미가 얼마나 개꿀인지 른다. 쓸데 있는 공부도 잘 안 하니까.  


배우고 익히는 것을 즐겼고, 세상 온갖 것들에 호기심이 넘쳐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찬 세상이 그리 심심하지는 않았다. 위치성을 자각하면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하나의 관점이 되었다. 관점이 되어 해석하는 일은 매우 주체적이어야 잘 이루어지는 일이어서 독보적인 쾌감이 있다. 글 쓰는 일을 인생의 무의미를 견디는 수단으로 삼고 나니, 웬만한 힘든 일도 괜찮아, 이따 글로 쓰면 돼...라고 되뇌면 견딜 만해진다. 매일 젠더, 인종, 계급 이슈를 들여다보는 일, 하나의 관점이 되는 일. 산다는 무의미 자체를 견디는 일. 특히 근래 본격적으로 시작한 자연과학 공부는 심장이 쫄깃하도록 잼났다.


다만 공부는 외롭고 혼자 사막에서 우물을 파는 일이었다. 스터디를 만들고 세미나를 하고 모임을 이어간다 해도 결국 공부는 혼자 해야 하는 거였다. 내가 하는 공부는 당파성도 강한 것들이어서 정치적 지향이 강렬했고, 극우 보수, 호모포비아, 가부장체제수호자 및 부역자, 부동산시장에서 덕 본 자, 계급차별주의자, 사회적 약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를 당연시하는 자와 함께 할 수 없도 했다.


그런 와중에 '꾸준히 글쓰기&공부하신다는 약속을 부탁'드린다니. 꾸준히 밥 먹고 숨쉬기를 부탁드린다는 거나 마찬가지인, 내가 받아본 평생의 부탁 중 가장 쉽고도 엄숙한 부탁이었다.


호그와트 마법학교 추천서라도 받은 듯 떨리는 마음으로 D Lap에 퐁당 빠진 건 시간문제. 스스로 욕망하고 스스로 기획하고 알아서 공부하고 이를 종이에 직접 손으로 써서 물질화하는 과정이 있고, 온라인에서 매일 인증이 이루어졌다. 매일 할당량의 종이에 공부의 손때가 묻히고 사진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갔다. 안 해본 사람은 모다. 이 과정에서 다가오는 하루하루의 긴장감과 의무감, 뿌듯함과 자긍심.


내가 알아서 하는 공부, 그동안의 키워드를 살펴봤더니 내 마음도 드러다. D Lap에선 헤매는 일도 재미있어서 즉흥적으로 살행 가능성 별로 없는 여행을 계획하고 여행지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동선을 짜는 것으로 시작했다. 일주일 간의 공부를 마치고 나니 오드리로드를 제대로 읽고 싶어서 흑인 페미니즘을 한동안 팠고, 우주로 관심을 옮기기까지 피타고라스, 제임스조이스, 데어라 혼을 잠깐 거쳐가기도 했다. 하루하루 알고 싶은 지식을 좇았고 지금은 우주와 뇌과학에 안착. '우주에 한 번 빠져 봅시다'란 주제로 우주에 먼저 빠진 자로서 한 시간 내외의 강의를 기획했고 랩에서 실제 강의를 하기도 했다.


D Lap에 참여한 후 가장 큰 수확은 알고 배우는 일의 순수한 기쁨 그 자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 앎은 그저 얻어지지 않으니, 정희진 샘은 이걸 피학적 쾌락이라 부르시던데, 아는 것은 고통받는 일도 하니까. 삼십 년도 더 지난 그때 5.18이나 4.3을 알게 되었을 때. 알면 알수록 더 고통스러운 지식도 있다. 특히 실천을 요구하는 앎들이 있고, 비겁함을 못 견디게 하는 지식들도 있다.


그런데 D Lap에서는 고통스러운 앎을 요리 저리 피해 다녔다. 세상이 이리 무지한 권력에 지배당하지 않았다면 피학도 가학도 필요 없는 앎으로도 하루하루가 충만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이 '공부하라 그리고 증명하라'는 메시지가 있을 뿐 뭘 공부할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손에 달려 있는 랩실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고독하고 고통일 것을 알면서도 다가가야만 하는 앎이 오기도 할 테고, D Lap 안에서 다른 분들의 고독과 고통을 마주하게 될 때도 오겠지. 그때는 사막에서 혼자 우물 파는 고독이 아니라, 띄엄띄엄 저 멀리서 혼자 우물 파는 사람들 보면서 삽에 힘을 보태고 있을 것 같다. 성실하게 표현하지 못했지만 각자 영역에서 부지런히 하루하루의 공부를 쌓아나가다른 랩실 구성원들도 큰 위로가 된다.


아침에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경지까지 가고 싶지는 않다. 다만 고독과 고통이 죽도록 두렵지는 않으니 실컷 공부를 즐기다 가야지.


1년에 보통 잉크 한 통을 쓰는데 파카 큉크 잉크 57ml가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다. 세상에..57ml 잉크는 무슨 궤적을 만들었을까. 색깔 고운 잉크로 꽉 채워진 만년필을 내 멋대로 휘두르는 맛. 다시 한 동안 쓸 새 잉크를 기다리는 설렘.


잉크병도 재활용하니까 잉크나 만년필 사용은 쓰레기를 전혀 만들지 않는 필기방식이어서 참 좋다. 다만 수첩을 물에 잠깐 담갔더니 반년 치 기록이 날아가버리는 경험은 뼈아팠다. 만년필로 글쓰는 것이 좀 두려워졌다.

그동안 손으로 직접 쓰며 채운 노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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